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10월 13일 14시12분
[아침발걸음]오봉 김제민의 가을날 한시 기행
訪鄭慶遇於霞谷臨別留題精舍壁上
靑眼交栖霞谷奇 청안과 하곡이 서로 사귀어 깃들어 사는 게 기이하여
來尋山路暮秋時 늦은 가을 어느 때에 산길 따라 깊은 산속을 찾아갔노라.
蒼苔石上開情話 푸른 이끼 낀 돌 위에서 서로 정담 나누고서
紅樹技邊倒酒危 붉은 나뭇가지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네.
仙界莫辭留俗筆 선계에서 사는 자네, 세속의 때묻은 글이라고 버리지 마소.
天神應爲洗塵詩 천신께서 응당 때가 묻은 내 시를 깨끗이 씻어줄 것이네.
依依若與佳人別 서로가 떨어지기 아쉬움이 마치 연인과의 이별 같구려.
回首忘鞭去路遲 고개를 돌리고서 馬鞭을 잊으니 가는 길이 더딜 수밖에.
이는 '방정경우어하곡임별유제정사벽상(訪鄭慶遇於霞谷臨別留題精舍壁上)'라는 제목의 한시이다. 충강공(忠剛公) 김제민(金齊閔:1527 중종 22∼1599 선조 32)이 존경하는 벗 정운용(鄭雲龍)을 보고 싶어 전라도 장성 개천정사(介川精舍)를 찾았다. 그와 교유하고 정담을 나누고 나서 헤어지기를 아쉬워하며 돌아오면서 지은 칠언배율(七言排律)의 한시이다. 개천정사는 장성군 북일면 월계리 오정마을에 있다. 제목은 “다정한 벗 정운룡을 찾아 하곡(霞谷)에 갔다가 헤어지게 되어 개천정사 벽상(壁上)에 시를 남기고”라는 뜻이다.
지기지우(知己之友), 오래 사귄 벗과 모처럼 만나 더불어 술 한잔 나누노라니 차마 헤어지기 어렵다. 결코 말에 채찍을 가하지 못한다. 그런 경우엔 헤어지기 아쉬워 말을 타고서 술을 한 잔 마신다. 그것을 일명 “마상주(馬上酒)”라고 일컫는다.
중봉 조헌(趙憲:1544~1592)도 정운룡의 인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1586년 10월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중봉은 선조에게 올린 붕당의 시비를 논한 상소문에서 이의건, 이희삼, 변사정, 정운룡과 같이 공론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이 중용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였다.
정운룡은 전남 장성 황룡강 상류 개천(介川) 근처에 정사(精舍)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니, 박순(朴淳)이 찾아와서 칭찬하기를 “운림(雲林) 속에 초가집 짓고 고요히 앉아, 학문을 연구하니 그 멋을 아는 이 누구일까? 그대만이 홀로 즐김을 경탄하노라.”라고 하였다. 박순, 고경명 등과 같이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뒷날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오봉 김제민은 이 무렵 전라도도사가 되어 고향에서 가까운 마을 내장산(內藏山)을 들러 만산홍엽(滿山紅葉)의 단풍 경치를 읊었다.
內藏山遊賞楓葉次尹敬差官覃休伯亭韻
行行山路轉無窮 가도 가도 산길이 구불구불 끝이 없고
一夜新霜萬木紅 하룻밤 내린 서리에 만산이 홍엽이로세.
蕭寺客窓驚忽起 조용한 절에 있던 나그네가 깜짝 놀라 일어나니
數聲胡雁帶西風 기러기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줄을 지어 서쪽으로 날아가네.
'內藏山遊賞楓葉次尹敬差官覃休伯亭韻'이란 시는 내장산에 놀러가서 단풍을 감상하고 지은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휴백정(休伯亭)은 내장산 안에 있던 정자인 듯하다. 오봉 선생은 의병장이면서도 시인이요, 낭만적인 가객이기도 하였다. 조선 선조(宣祖) 때나 지금이나 내장산 단풍은 참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유종국(문학박사 전 전북과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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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10-14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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