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1월 10일 07시53분
전주에는 정양이 있다
[책 마주보기]정양의 '헛디디며 헛짚으며'(하채현)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잘만 돌아간다던데
학살인지 교통사곤지
생목숨들 生水葬 시킨 세월은
맹골수도에 거꾸로 처박힌 채로
유신시대로 삐라시대로 서북청년단시대로
한반도의 세월을 무식하게 되감는다
옛날에 눈 질끈 동여매고도
공중 나는 새를 떨어뜨리던 신궁이 있었다던가
수사권도 기소권도 없이 백성들은
되감기는 세월의 과녁을 정확하게 쏜다
이게 진상이냐 이게 구조냐
이게 루머냐 이게 불온이냐
이게나라냐이게나라냐이게나라냐
바다도 비좁다고 파도는 몸부림치고
꽂히는 화살마다 부르르 떤다
-‘이게 나라냐’, '헛디디며 헛짚으며' 33쪽, 정양
모악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제8회 구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부에는 1950년대 서사가, 2부와 3부에는 2010년대 한국의 굵직한 서사가, 4부에는 한국인이 본 중국이 담겨 있어 시공을 뛰어넘어 다채롭게 읽힌다.
이야기 시를 좋아하면 일독을 권한다. 고스톱에 끼지 못해 풀 뽑으러 다니고(‘풀 뽑기’), 티비 소리 없으면 정막해서 못 자는 할아범이 되었는데(‘겨울밤’) 어린이집 가는 손자에게 존대하라는 며느리에게 살짝 반기를 들어보기도 하고(‘야이 슈발’), 산동사범대학 부예서 학생과의 인연을 간직하기도 하여(‘그리운 할아보지’) 재미나다. 그 중 “아이 슈발”을 보면, ‘놀이터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서 세 살짜리 손자에게/ 현관을 발로 힘껏 걷어차고/ 야이 씨팔 문 안 열래?/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문 여는 법을 알려준다/ 손자는 시키는대로/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시키지 않아도 거듭 걷어차며 외친다// 질색하며 나온 며느리가/ 제 아들을 껴단고 황급히 들어간다/ 잠시 후 손자가 다시 와서/ 할아버지 대학교수 맞냐고/ 앵무새처럼 쪼아린다’(56-57쪽) ‘할아버지 대학교수 맞냐고’ 흉내낸 말은 며느리의 것이다. 아이는 막 키워야 잘 큰다는 마음이 할아버지에게, 뭔 소리냐 조심조심 키워야 한다는 마음이 며느리에게 따로 있다.
작년 12월, 작은 회의실에서 정양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그의 시 세계와 비평, 전북 문단에 끼친 영향 등이 발표되고 참여자들의 토론이 이뤄졌다. 여기에 신아출판사 서정환 선생님이 오셔서 정양 시인과의 일화를 소개하였는데 모두에게 정양 시인이 우리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억하는 자리로 돌변하는 바람에, 나는 전주에는 정양이 있다가 ‘전북’에는 정양이 있다로 변하는 순간이 느껴졌다.
한편, 올해 5월 27일에는 명동의 호텔에서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이 있었다. 운문에는 김윤희의 “핵에는 책으로”가, 산문에는 윤흥길의 “문신”이 수상작이다. 전주에 정양 시인이 있다면, 전주 대표 소설가로는 윤흥길이 있다. ‘두문불출하는 천재적 능력을 주신 창조주에게 감사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힌 윤흥길의 외길 소설 집필은 빛나는 그의 작품들로 탄생하였다. 정양과 윤흥길. 전주의 두 개의 기둥이 있어서 전북의 문사가 끊이지 않는다. 전주의 정신사가 두 물줄기로 넘실댄다.
하채현 작가는
생태에세이 '수수에게 들키다' 저자
인문도시센터 공동연구원
우석대 국어교육과 교수
지면 : 2025-11-11 10면
http://sjbnews.com/864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