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11월 20일 14시08분
[전북의 창]문산 김삼룡 길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
고(故) 문산 김삼룡(1925~2014) 선생은 바로 그런 ‘조용한 헌신의 상징’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의 연구와 보존의 토대를 세운 분으로 학계와 현장에서 받는 존경은 깊고도 넓다. 1973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를 설립해 30여 년간 미륵사지·백제왕궁·오금산성 등 핵심 유적의 조사연구를 이끌었고, 1974년 미륵사지 동탑지 발굴로 미륵사 가람 구조의 실체를 밝혀 백제 수도 익산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어 1975년 백제왕궁 궁장 발굴을 통해 ‘익산천도설’을 입증할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한 일은 한국 고고학사에서 중요한 성취로 평가된다. 이 연구의 연장선에서 익산은 2004년 대한민국 4대 고도로 지정되었고,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필자가 처음 선생을 뵌 것은 1991년 미륵사지 발굴현장이었다. 학연·지연·혈연 등 어떤 관계도 없었지만, 현장에서 보여주신 열정과 친절, 그리고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분명한 신념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이후 미륵사지 정비와 석탑 보수사업을 추진할 때에도 그는 늘 현장을 찾아 격려하고 방향을 제시했다. 익산과 전북 문화유산에 바친 선생의 헌신은 한 지역의 역사 정체성을 세운 과정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런 공적이 있어도 사회적 존경과 기념이 항상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유명세 중심의 기억문화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적 명성’이 곧 ‘기억할 만한 가치’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사람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유지된다. 문화유산 연구자, 현장 기술자, 지역 활동가, 교육자, 공공 분야 전문가 등은 대개 조용하지만, 이들이 없으면 지역의 역사·문화·환경·정체성이 통째로 흔들릴 수 있다. 문산 김삼룡 길 표석 제막식은 바로 그 간극을 메우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익산 왕궁리유적에서 미륵사지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선생의 삶의 현장이자, 익산의 문화유산 연구가 시작되고 발전해 온 ‘지식의 축’이다. 이 길을 공식적으로 이름 붙이고 기념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공적을 넘어,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기억해야 하는지 밝히는 선언과 같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화려한 유명세 뒤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지속을 위해 묵묵히 헌신한 사람의 삶과 정신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문산 김삼룡 길은 바로 그 상징이며, 그를 통해 우리 사회는 ‘조용한 헌신’의 가치를 다시 배우게 된다. 이번 표석 제막식이 일회적 행사가 아닌, 우리 사회가 다양한 분야의 숨은 공로자들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문화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이 이어질 때, 앞으로도 문화유산·학문·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존중받고,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후배 세대가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문산 김삼룡 길 앞에서 되새겨야 할 이유다./노기환(온문화유산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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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11-21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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