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1월 26일 16시13분
[금요수필] 멈춤의 미학
이종순
붉게 타오르던 단풍이 내려앉아 바스락대는 소리는 마치 한 해를 정리하는 작은 탄식처럼 들려온다. 그것은 곧 우리들의 시간, 지나온 인연 그리고 덧없이 흘러가 버린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아침 햇살 아래 투명하게 비치는 차가운 공기는 잊혀가는 기억을 선명하게 일으켜 준다.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얼굴, 이루지 못한 꿈의 조각들 그리고 고마웠던 순간들의 파편들, 십일월은 이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따뜻한 멜랑콜리(깊고 조용한 슬픔)로 감싸 안는다. 옷깃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은 삶의 온기를 찾아들게 한다.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한해의 여정, 우리 곁에 남아준 소중한 이웃의 존재. 이 모든 인연이 계절의 쓸쓸함과 대비되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고 있다.
고독을 불러오는 저녁, 해가 짧아지면서 세상이 일찍 어둠에 잠기는 시간, 코트 깃을 세우고 걷는 거리에서 자신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복잡했던 인간관계와 목표를 잠시 내려놓고, ‘나’라는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두면, 희미하게 보이는 창밖 풍경처럼 마음속 번뇌도 희미해져 간다. 그것은 바로 ‘비움과 준비’의 가치다. 잎을 떨군 나무가 겨울의 혹독함을 견디고 새봄을 준비하듯, 중장년의 인생도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에너지를 응축해야 할 때임을 조용히 알려 준다.
12월의 소란스러운 연말 분위기가 시작되기 전, 이 고요한 11월이야말로 우리 삶을 단단하게 다지는 시간이다. 이렇게 숙연한 고독은 결코 절망이 아니며, 오히려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조용한 희망의 씨앗이 아닌가 한다. 첫서리가 내리는 날부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한다.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인사는 한 해의 끝을 준비하는 멈춤의 시간이기도 하다. 십일월의 멈춤의 미학은 때론 우리를 성장시키기도 하면서 ‘완벽하지 않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도록 깨우쳐준다. 풍성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은 뭔가가 어설프고 모호하면서도 쓸쓸한 계절은 우리의 삶과 그리도 많이 닮은 것도 같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아쉬움이 교차 되는 우리의 일상처럼, 그 모든 불완전한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포용해주는 어쩌면 지나간 것들에 대한 겸손한 서약일지도 모른다. 어렴풋하게 깨달은 아련함이야말로 가장 서정적이고 감동적인 ‘멈춤의 미학’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이 계절을 통해 삶의 모든 순간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진실을 깨달은 것 같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예사조'로 수필 등단, '시조문학'으로 시조시인 등단.
문학박사. 우석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한국국보문학 시조부문 대상 수상.
교육부 유보통합 연구진 교육부장관상 수상
'창의 숲 연구소'와 '아이가 크는 숲' 대표
지면 : 2025-11-28 10면
http://sjbnews.com/865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