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2월 01일 08시02분
베르디가 심장을 쏟아 만든 ‘운명의 힘’
[공연 리뷰] 호남오페라단 창단 40주년 기념 공연 베르디의 ‘운명의 힘’ 오페라(남정숙 문화예술평론가)
지난 달 14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호남오페라단 창단 40주년 기념으로 공연된 베르디의 ‘운명의 힘’ 오페라가 그랬다.
오페라 서곡 중 가장 아름다운 서곡,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은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입장하는 문의 인상이 달라지는 것 같다. 지휘자 ‘클라우디오 마리아 미켈리(Claudio Maria Micheli)’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연상될만큼 강렬한 인트로 3음절마저 단호하지 않게 연주하고 그 이후 긴장과 해소의 반복인 연주들조차 부드럽고 연결되도록 연주하므로, 지휘자가 비극적인 운명 속에 허우적거리는 세 청년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처럼 들려주니 그들 운명의 수레바퀴 안으로 들어서는 관객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 앞에 무기력하게 따르게 되는 세 청년들의 모습에 연민의 눈으로 따라가게 된다.
서곡부터 좋았다. ‘클라우디오 마리아 미켈리’ 주도의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힘이 오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처럼 유려하고 정확하며, 관객들에게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했다.
‘운명의 힘’은 분명히 낭만주의 시대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비극에 기독교 세계관의 언어를 따르는 것처럼 독특하다. 식민지 잉카제국 왕족의 후예인 ‘돈 알바로’ (테너)와 스페인 귀족 칼라트라바 후작의 딸인 ‘돈나 레오노라’ (소프라노)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당연히 레오노라의 가족들은 이 연애를 반대한다. 이민족 청년 알바로는 기독교관으로 망설이는 레오노라를 다그쳐서 사랑의 도피를 하려다가 발각되고 거기에 더해 오발로 인해 아버지 칼라트라바 후작을 죽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이들은 갑자기 철천지 원수가 되어 칼라트라바 후작의 장남인 ‘돈 카를로’는 이 둘을 추격하며 복수를 하려고 하고, 남자주인공 ‘알바로’는 군대로 도피하기도 하고, 수도원으로 도피해서 수도사가 되기도 한다. 여주인공 ‘레오노라’도 죄책감에 연인과 속세를 떠나 수도원의 동굴로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고 돌아 피해자의 아들 ‘카를로’와 가해자인 ‘알바로’를 전장터에서 절친으로 만들고, 정체를 알게 된 ‘카를로’는 복수를 맹세하고 ‘알바로’를 죽이려고 하지만 결국 죽이지 못하고 대신 동생 ‘레오노라’를 죽이게 된다.
모두 4막으로 되어 있는데 점차 농도가 진해지는 극적 전개와 압도적 선율들, 스펙타클한 사건들과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들의 진정성있는 성격 묘사를 아리아들과 이중창으로 잘 표현해 간다.
레오노라 역의 ‘김라희 소프라노’와 알바로 역의 ‘박성규 테너’, 카를로 역의 ‘한명원 바리톤’의 조합은 거의 완벽했다. 호남오페라의 캐스팅은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특히 주인공 레오노라의 노래와 레치타티보가 너무 양이 많아서 저걸 다 어찌 외웠는지 걱정될 지경인데도 ‘김라희 소프라노’는 3시간 동안 끝까지 힘을 놓치지 않고 하나의 긴 호흡처럼 유려하게 불렀다. 박성규 테너와 한명원 바리톤도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잘했다.
주인공 세 사람이 심각한 연기를 했다면 이들을 상쇄할 조연이자 신기있는 무녀 프레치오 실라 역의 ‘최승현 메조소프라노’와 이에 대척점에 있는 코믹한 주책 멜리토네 수도사 역에 ‘김지섭 바리톤’, 진짜 어른같은 진지하고 포용적인 수도원장 과르디아노 신부역에 ‘길경남 바리톤’ 성악가 모두 실력자들이다. 연기도 노래도 너무 잘했고, 적재적소에 어울리도록 등•퇴장도 전략적이었다. 오페라합창도 지금까지 본 합창단 중에 제일 좋았다. 전주시립합창단 정말 잘하셨습니다. 거의 완벽한 이상적인 오페라 공연이었다.
그동안 많은 오페라를 봐왔지만 이번 베르디의 ‘운명의 힘’처럼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살아있고, 음악이 그 개성들을 드라마틱하게 살리는 연주는 처음인 것 같다. 연기와 노래와 연주가 어색함 없이 녹아 들어가고, 각각의 인물들의 성격과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 같은 다양한 변주들도, 각각의 이야기들이 파편처럼 강렬하게 터지다가 결국은 하나의 실에 꿰어들어가는 것처럼 통합적으로 모아져서 마치 운명의 수레바퀴를 조종하는 신이 베르디 자체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베르디 오페라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고, 더 열심히 베르디 오페라를 공부해야 되겠다는 각성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김지연 연출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간혹 젊은 연출가들의 치기어린 연출로 낭만주의 오페라를 이해 안되는 미니멀리즘 무대배경에, 숫자만 많아 보이게 만드는 시대고증없이 대충입은 들러리들, 작가의 의도와 다른 독자적인 해석으로 그나마 남은 관객들에게 외국문화인 오페라를 더더욱 멀리하게 만드는 몇몇 연출가들과 달리 베르디에 대한 인물과 시대배경을 연구하고 마음을 이해하고자 운명의 틀을 회전무대 장치와 거대한 십자가, 회전하는 무덤가에 녹여내어 관객의 이해를 돕게 했던 연출서비스와 다수의 출연자들을 몰입하게 하고 끝까지 집중도있게 끌고 간 리더십도 훌륭했다.
그리고 환경적 열악함을 극복하고 최고의 캐스팅•완성도를 위한 최고의 지휘자와 청년 연출가와 청년 오페라 가수들에 대한 투자, 정통 오페라가 생존할 수 있도록 화려한 무대세트와 무대효과•극적효과를 위한 엄청난 조명과 음향시설들, 대규모 합창단과 코러스•무용단과 의상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선택한 장엄한 주제와 장대한 스토리의 작품선정을 하고 운영한 호남오페라 조장남 단장님께 감사함을 전한다. 뮤지컬과 소극장 오페라에 밀리고 있는 시대에 정통오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처럼 든든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일부 문화유산처럼 전승자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빛나는 재능을 보여줄 기회만 기다리고 있음에도 오페라 지원이 쪼그라들 듯 줄어드는 것은 문화사적 불행이다. 메가 오페라는 뮤지컬이나 소극장 오페라로 대체할 수 없는 분야이다. 오페라 지원이 더 줄어들어 오페라라는 종목이 대한민국에서 사라진다면 빛나는 오페라인들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페라라는 분야를 모르고 성장하는 아이들과 국민들도 불행해 질 뿐이다. 정부는 오페라가 자연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기초예술의 장르로서 오페라를 인정하고 지원방식을 바꿔서라도 오페라를 살려야 한다.
지면 : 2025-12-02 10면
http://sjbnews.com/865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