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2월 25일 12시07분
[금요수필] 운조루에서 길어 올린 서정
이종순
마치 한 해 동안 간직했던 추억들을 소리 없이 보내려는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어지러운 상념을 일깨워 주고 있다. 지리산의 깊은 숨결이 섬진강의 물줄기를 따라 고요히 잦아드는 땅, 오미리 마을의 낮은 언덕과 250년 여년 세월의 풍상을 묵묵히 겪고 있는 고택 운조루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으로 그 자리를 빛내면서 고고한 자세로 의젓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나고, 새들은 지쳐 둥지로 돌아온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이름을 빌려온 운조루는 내 발이 닿는 순간부터 도시의 번잡함에서 멀어지는 유유자적한 경계를 열어 보였다. 앞마당에 이르니, 세월의 흐름 속에 풍요롭게 익어가는 감나무에 아스라이 매달린 붉은 홍시가 산자락의 풍경과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배산임수의 길이라 불리는 이곳은 굽이치는 능선을 포근히 감싸 안고, 집 앞에 펼쳐진 너른 들판과 고즈넉한 연못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켜 주면서 시간이 느린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쉰다섯 칸의 기와집의 위용보다, 곳곳에 스며 있는 삶의 온기가 더 크게 다가오는데 사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흰 구름이 한가롭기 그지없어 운조루의 이름처럼 구름 속에 깃든 새들의 집이었다. 이 고택의 진정한 서정적인 감동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보다도 내 심장을 두드린 것은, 화려한 건축미가 아닌 ‘타인 능해’라는 글귀가 새겨진 쌀독이었다.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간다는 이 쌀독의 마개는 아랫부분이 열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한다. (他人能解-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눌러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 ‘他人能解’라고 새겨진 이 짧은 문장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쌀독의 작은 구멍. 그것은 가난한 이웃을 향한 따뜻하고 겸손한 배려의 창구(窓口)로 베품의 미학이 응축된 장치였다. 천석꾼 만석꾼의 부귀영화를 뽐내기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이웃과 고난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옛 선비의 숭고한 정신은 시간을 뛰어넘어 세월이 흐르는 듯 고요했다.
초겨울의 스산함 속에서 이 숭고한 나눔의 정신을 마주하니, ‘인간의 도리’란 계절의 변화와 상관없이 늘 따뜻해야 한다는 깨달음이 섬광처럼 마음을 스쳤다. 나눔으로 정을 나누고, 그 나눔의 정신이 곧 가문을 지키려는 힘이 되었으리라.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운조루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재산을 지키려는 노력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는 이타심(利他心) 덕분이었다는 해설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채로 들어가는 디딤돌 하나에도 역사의 혼이 남아 있으며, ‘ㅁ’자 구조의 안채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온전히 여성들의 공간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부엌이 고단했던 여인들의 삶이었음을 상상해 본다.
운조루를 나서며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며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했다. 혹시 나만의 욕심 때문에 ‘타인 능해’의 소중한 가치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구름처럼 무심히 왔다가 새처럼 지쳐 돌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운조루는 잠시 멈춰 서서 우리 안의 이타적인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는 무언의 가르침을 주는 시간이었다.
고택의 고요함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던 삶의 본질을 찾은 듯한 운조루는 단순한 옛집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겸손과 나눔의 인문학적 공간이었다. 구름 위에 사는 새처럼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살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그곳 운조루에서 깊은 감동과 함께 잔잔한 위로를 받고 돌아온 잊지 못할 한 페이지의 추억을 길어 올린 서정의 시간이었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예사조'로 수필 등단, '시조문학'으로 시조시인 등단.
문학박사. 우석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한국국보문학 시조부문 대상 수상.
교육부 유보통합 연구진 교육부장관상 수상
'창의 숲 연구소'와 '아이가 크는 숲' 대표
지면 : 2025-12-26 10면
http://sjbnews.com/868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