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 민주화운동은 70년대 이래 재야, 종교지도자의 역할이 컸다. 강희남, 조용술(2004년 작고), 은명기 목사(1996년 작고)를 비롯한 기독교계 원로와 문정현, 박창신, 문규현 신부를 필두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주로 참여한 천주교회 민주화운동 인사들은 70년대 반유신투쟁 이후 전북지역 재야운동의 산파역이자 강력한 후견자 역할을 했다.

90년대 이후 민간 통일운동에서도 전북지역 종교계 인사들은 지역운동을 넘어 전국적인 차원의 통일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냈다. 1988년 8월 1일, 남쪽 각계 인사 1,014명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발기취지문’을 발표한다. 남과 북, 해외의 동포들이 다 참여하여 조국통일방안과 통일실천과제를 논의하는 범민족대회를 제안한 것이다.

그해 12월 9일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 명의로 범민족대회 개최를 지지한다는 답신이 왔다. 다음 해인 1989년 3월 1일 범민족대회 개최를 위한 남, 북, 해외 예비실무회담이 예정되었지만 당국의 원천봉쇄로 무산되고 남측 대표들 전원이 연행되었다. 민간차원 통일운동의 한계가 드러났지만 곧바로 3월25일 문익환 목사가 전격 방북하고 6월 30일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방북이 이어지면서 정국은 남북문제를 놓고 들끓기 시작했다.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문규현 신부의 구속으로 마감된 89년의 통일운동은 90년 들어서 범민족대회 개최 열기로 이어진다.

7월27일 해외대표단이 서울에 도착해 남, 해외동포들 회담이 열렸고 당국의 거듭된 제지로 1990년 8월15일 판문점 북측지역에서만 범민족대회가 개최된다. 남측대표단은 경찰 저지로 참가를 못했는데 89년 방북 이후 해외에 체류중이던 황석영 씨가 남측대표로 판문점 북측지역에 참가했다. 남측은 범민족대회 남측행사(8.17) 행사에서 범민족적 통일운동체 결성을 결의하고 이 결의에 바탕하여 세 사람의 남측 대표가 독일 베를린으로 날아가 북과 해외 대표를 만나는 일이 벌어진다.

3자 대표는 90년 11월 19일∼20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을 결성하게 된다. 1989년 12월 부란덴부르크 문이 극적으로 열리면서 통일독일시대를 맞이하게 된 바로 그 장소에서 분단 역사상 최초로 민간진영의 3자회동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 회동을 지켜본 참관자였던 소설가 황석영은 “범민련은 1990년 판문점에서 열렸던 제1차 범민족대회의 성과물로서 쟁취하였던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남측 대표로 참석한 조용술, 이해학, 조성우 선생이 아니었다면 범민련의 완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 사람은 귀국 즉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당시 일흔을 넘긴 노인으로 머나먼 유럽으로 날아가 남북 민간의 만남을 일궈낸 조용술 목사는 70년대 반유신 설교로 구속된 이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해온 교계의 원로이자 전북 지역운동의 큰 버팀목이었다.

조 목사는 일제 치하인 1920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한신대를 졸업하고 전북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1977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장을 맡았고, 1982∼84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회장, 기독교농민회 전국연합회 이사장, 한국기독교원로회의 의장,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고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고문, 한반도통일범민족대회 공동본부장,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상임고문 등을 지내면서 평생을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남북의 화해, 평화통일에 헌신하다 2004년 11월 15일 새벽 군산 자택에서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범민련 결성 후 대대적인 공안탄압이 이어졌다. 베를린 회동의 결과에 따라 1991년 1월 23일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회가 결성(준비위원장 문익환 목사, 실행위원장 이창복 전민련 의장)되었으나 준비위원장과 실행위원장이 곧바로 구속되면서 결성이 지체된다. 남측본부는 95년 2월 25일에서야 정식으로 결성된다(초대 의장 강희남 목사). 1997년 대법원은 연방제 통일 지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내세우고 있다는 이유로 이적단체 판결을 내리는 등 범민련의 길에는 오랜 시련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1년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한 후 남한은 소련,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교차승인의 정신에 따라 북한도 마땅히 미국이나 일본과 국교를 맺었어야 하는데 그리 되지 못하고 미국의 대북봉쇄정책만 남았다. 속임수에 속아 영구분단정책이 된 것이다.”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초대의장을 맡은 강희남 목사는 이렇게 일갈한다. 5.16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총칼로 국권을 탈취한 박정희 정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데다 이런 나라의 국민 노릇을 한다는 것이 창피하고 분하다”며 주민등록증을 찢어버린 ‘강골’이었던 강 목사는 이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까지를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간주해 이들 정권을 부정하는 상징적 의미로 35년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았고 각종 선거의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강 목사는 남은 반쪽인 북측을 빼고 어찌 ‘전국’이라는 말을 가져다 쓸 수 있느냐고 당시 전민련도 반드시 ‘남한민련’으로 불렀다.

전북지역 재야원로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강희남 목사는 1920년 전북 김제(金堤)에서 출생했다. 한신대를 졸업하고 1955년부터 40여 년간 김제 난산교회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77년 긴급조치 9호로 1차 투옥되어 3년간 옥고를 치룬 것을 시작으로 수차례 투옥을 거듭했다.

80년대에는 전국농민회 이사장, 문익환 목사와 결성한 민통련 대의원대회 의장, 전민련 고문 등을 맡아 재야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1986년 11월 전북대 강연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옥중에서 4.13 호헌조치를 듣고 87년 4월 23일부터 40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인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이다. 강 목사는 ‘민중주의'라는 저서에서 “민족의 재통일(reunification)은 과거 항일투쟁 이상의 탈-아메리카 투쟁이 있기 전에는 요원한 일”이라고 볼 정도로 반 외세에 있어서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는 쪽이다. 강희남 목사는 최근에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민중주의 이념을 우리 역사 속에서 풀어내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범민련의 결성과 그 이후 범민족대회의 개최까지 통일운동의 전개는 89년을 정점으로 한 통일열기에 힘입은 바 컸다. 분단상황을 넘어선 남북의 만남과 통일연대기구 구성, 범민족대회 등 대중적인 통일축전 개최에 집중했던 통일운동에 큰 환경변화가 있게 된다. 90년대 초반부터 북측은 심각한 위기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1991년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시작으로 1994년의 식량배급 중단사태 등 식량생산의 지속적 감소 추세에 더하여 1995년∼97년 3년간 북한을 덮친 자연 재해로 식량공급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1997년 무렵에는 전체 인구의 6%에게만 식량 공급이 가능할 정도로 위기는 심화되었다. 북의 기아와 식량위기는 적은 경작지와 에너지 집약적인 농업생산의 한계가 자연재해로 인한 에너지 생산의 감소와 더불어 구소련 및 동구권의 붕괴로 인한 공업용품 수입의 절대 감소, 집단생산 방식의 한계 등이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3년 재해동안 식량부족은 매년 150∼200만 톤에 이르렀다. 외부 곡물 도입에서 국제사회의 무상지원에 의존하는 비율이 해마다 커져갔다.

이시기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GNP)도 991달러에서 457달러로 절반 가까이 감소하였다. 식량난에 따른 기아와 이와 관련된 질병 및 의료체계의 미비 등이 겹쳐서 대량의 사망자를 내게 되었다. 북한 당국의 공식 통계(2001 UNICEF 회의에서 최수헌 북 외무성 부상이 밝힌 내용)로도 식량난 때 사망한 북한주민은 22만명에 이른다. 국경없는 의사회(MSF) 추정으로는 350만명까지 늘어난다. 이 시기에 온성, 회령, 무산 등 동북부 변경지대를 중심으로 식량난을 이유로 대량 탈북자들이 발생하고 이들이 겪은 중국 지역에서의 수난이 알려지면서 남쪽 사회에 북녘동포를 돕자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이념과 가치 지향의 이전 통일운동에서 인도주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동포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전북에서는 1997년 4월 4일 전북종교인협의회 발의로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와 각계 인사들이 모여 북녘동포돕기운동 전북본부(이하 전북본부)를 창립했다. 전북종교인협의회는 96년 한상렬 목사 등이 주도하여 만든 범종단모임으로 종교인들이 지역사회와 역사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모였는데 그 안에서 북녘의 참상을 전해듣고 자발적으로 북녘동포돕기운동이 조직된 것이었다.

전북본부는 창립 이후 13개 시군지역을 순회하면서 간담회를 마련했다. 간담회 후 8개 지역에서 시군지역본부가 결성되었다. ‘동전 한닢 1백원이면 옥수수로 한 사람의 하루 식량! 담배 한갑 1,000원이면 30명의 한끼 식량’이라는 호소에 많은 도민이 응답했다. 실제로 전북본부 상임공동대표 명단을 보면 조용술 목사, 최형 시인 같은 진보적 인사도 있었지만 김삼룡 애향운동본부 총재와 이병호 천주교 전북교구장, 김도영 전북불교총연합회장. 박정훈 원불교 전북교구장, 박기중 천도교 종법사 등 종단과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 지역인사들이 망라되었다. 각계각층이 참여해 걷은 금액이 6억여 원을 넘길 정도로 전북지역 도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렇게 모인 성금은 97년 8월초 옥수수 2,000톤으로 적십자사를 통해 전북도민의 이름으로 함경남도에 지정 기탁된 것을 시발로 98년의 성금 1억원 지정기탁, 98년 9월의 온실용 유리와 비닐의 함경남도 지정기탁 등으로 소중하게 쓰였다.

당시 전북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던 한상렬 목사는 이재봉 원광대 교수와 함께 98년 10월 3일∼10일, 7박 8일 동안 현장 확인차 북녘땅을 처음 방문했다. “분단의식을 넘어 겨레가 한몸이 될 수 있다는 소중한 체험을 그때 했다. 분단병은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었다.”

한상렬 목사는 그 체험을 바탕으로 지역을 넘어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통일을 전도하는 통일목회의 길을 신명나게 걷게 되었다고 한다. 97년 이후 이념 대립과 정세 긴장을 넘어 남쪽 각 지역에서 전개된 이같은 따뜻한 동포애 운동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가 근본적인 전환을 하게 되는 정서적 밑바탕으로 작용했다.

[인터뷰-한상렬목사]

한복 차림에 고무신, 무성하게 자란 수염과 늘 웃는 얼굴. 한상렬 목사(통일연대 상임대표) 하면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들이다. 통일운동과 관련한 뉴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손님’이 되어 버린 한상렬 목사는 전쟁둥이 1950년생이다. 태어난 해로 볼 때 어쩌면 운명적으로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게 됐는지 모른다는 소명의식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고 한다.

독일 신학대학 유학을 준비하던 그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 관련으로 광주 상무대에 수감되면서.

거기에서 광주의 실체와 마주치면서 이 모든 것이 분단(병)에서 비롯되었다는 뼈아픈 자각을 하게 되었다. 86년 출범한 고백교회의 십자가는 동학농민혁명의 전봉준 장군과 김개남 장군이 뜻을 합치던 봉동읍 구미리 집 뒤에 있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었다. 분단시대 역사 현장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통일시키겠다’는 의지였다고 한다. 고백교회를 지역사회의 올바른 신앙공동체로 일구는 한편으로 전북민협 공동대표, 전북민련, 전민련 상임의장 등 지역과 전국의 민주화운동단체 대표일꾼의 역할을 맡아 오래 헌신했다.

93년 출옥하여 지역에 복귀해서 시작한 일이 전북종교인협의회와 북녘동포돕기운동이었다. 종교간의 벽을 넘어 인간구원의 한뜻으로 만나자는 일이 자연스럽게 분단극복에 함께 하는 것으로 연결된 것이다. 한 목사는 “북녘동포돕기운동이 진행되면서 민족의식과 대동단결의 기운이 일어남은 종교인이 하나됨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일을 계속 기도하며 실천하면서 큰 힘을 얻었다”고 말한다.

한 목사는 98년 개천절 북녘동포 지원을 위해 평양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40여 차례 방북하였지만 방북할 때마다 통일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고 한다. 99년 목숨을 건 53일간의 ‘국보법폐지’ 단식농성을 한 것도 분단병을 벗어나 보고자 한 몸부림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분단병’이 확실하게 치유될 조짐을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보았다. 6.15 선언 이후 불과 6년이지만, 그 변화 속 한복판에 있으면서 한반도에 근본적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장기수 문제를 비롯한 분단역사 치유하기, 겨레돕기운동, 평화통일운동의 불을 지펴오면서 그는 요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보고 반미주의자라고 하는 분이 있어요. 틀린 말이에요. 사실 구미(求美)하기 위해서 반미(反美)하는 겁니다. 남북은 물론 세계가 한몸인 바에야 미국을 제대로 살려야 우리도 살고 세계가 바로 서는 것이죠. 미국이 그저 망하기만 하면 안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이재규 기획위원 /한재일기자 hji75@sj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