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정일.그 때가 언제이던가, 생각하니 벌써 백년이 아니라 백 십년도 훨씬 지났다. 1894년 가을 삼례에 모였던 동학군들 그들이 여산, 논산, 노성 거쳐 공주로 갔던 그 길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과 한숨, 그리고 절망이 남아 있을까 생각하며 도착한 삼례 도서관에는 김개남을 즉결 처분한 이도재의 비와 보은집회를 해산시켰던 어윤중의 비가 나란히 서 있고, 삼남대로를 따라 도착한 여산 역시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삼례기포로 동학군들이 이곳으로 올라오자 여산 부사 김원식이 동학 농민군에 합류해 김명덕과 함께 총참모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학군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일종의 첩자였고, 그의 배반을 알아챈 이유상은 김원식의 목을 베고 말았다. 그 당시의 사연을 여산동헌 뒤편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나 여산초등학교를 에워싸고 있는 아람드리 나무들이나 보았으리라.
그 옛날, 여산부사의 호령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을 여산동헌에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돌리고자 대원군이 세웠던 척화비와 여산을 거쳐간 관리들의 비석 몇 개만 서 있을 뿐이고, 관아가 서 있던 곳은 여산초등학교가 되고 말았다.
문이 굳게 잠겨 담을 넘어서야 볼 수 있는 여산동헌을 뒤로 하고 충청도 논산 땅에 접어들었다.
▲ 연무읍 금곡리 산18번지 정상에 무덤이 있다.이 산 전체를 마을에서는 견훤이 무덤, 또는 왕묘라고도 부르고 있다.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고, 커다란 봉분 앞에는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후백제 왕 견훤능" 이라는 비석이 서 있고, 남쪽으로는 70리 떨어진 전주의 뒷산이 잘 보인다.
조선시대에 충청도 은진현 땅이었던 연무읍 황화정은 조선시대에 신구 전라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하던 곳이다. 충청도는 진천군 만승면 광혜원(廣惠院)리 광혜원 터에 있는 정자에서 새로 부임하는 충청도의 관찰사와 퇴임하는 관찰사가 서로 관인(官印)을 주고 받았다고 하며, 경상도의 신구 관찰사는 문경새재의 중간쯤에 있는 교구정에서 관인을 주고 받았다.
▲ 곰나루.
전봉준과 손병희가 의형제를 맺고서 공주로 향했던 곳이 이곳 논산이었고 지금은 논산시의 한 면으로 소속된 논산시 노성면은 1914년에 논산으로 통폐합되기 전까지 하나의 현이었다.
그 노성면 교촌리에는 1878년에 창건되어 충남 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는 노성향교가 있으며 바로 그 옆에 중요민속자료 190호로 지정되어 있는 윤증 선생의 고택이 있다.
논산이나 공주를 답사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리는 이 집은 언제고 내가 갈 때마다 나를 반기는 듯 마음이 편안해지는 옛집이다. 조선 숙종 때의 이름난 학자인 윤증의 후손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차례 개수가 있었던 듯 지금은 19세기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집은 파평 윤씨들의 세거지인 옛 이산현에 있는 이산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 윤증고택.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 마당이 펼쳐져 있고, 방형지와 조그만 석가산을 조성한 아름다운 정원의 뒤편에 돌출한 사랑채가 있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이고 중앙에 진퇴를 둔 2칸의 사랑방이 놓이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된 사랑채의 마루에 걸터 앉아 바라보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랑채 왼쪽으로 비껴난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게 되는데, 문에서 바로 안채가 보이지 않게 맞은편에 ‘내외 벽’이라고 하는 널빤지 벽을 쳐서 돌아가게 한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오래 전에 동학 취재때 이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파평 윤씨댁의 종부(宗婦) 양병호 님과 후덕해 보이는 며느리가 김치를 담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대가 집의 가풍답게 어서 오시라고 흔쾌히 맞았다.
그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전주에서 동학 때문에 취재차 들렀다고 하자 “동학?”하며 말문을 열었다.
“돌아가신 어른들에게 들은 얘긴디, 동학군은 대적(大敵)이라고 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혁명가들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동학은 전라도에서 생겨났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이리로 왔다던가, 그 때가 한겨울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집 어른들은 많이 멕이고 많이 줘서 보내라고 했답니다. 그 사람들이 나무 재떨이를 놓고 갔는데 그것이 지금도 우리 집에 있어요. 동학군들 중에 몇 사람이 가면서 대문간에다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 불을 질렀던 디가 저기요.”
▲ 여산 동헌에 있는 척화비.
그는 이렇게 말하며 대문 위쪽의 검게 그을린 서까래를 가리켰다. 백 여년 전에 참다 참다 못참은 이 땅의 민중들이 남긴 흔적들이 지울 수 없는 역사로 남아 백 년의 세월을 무언으로 건네주고 있었다.
윤증(尹拯·1629∼1714)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자인(子仁)이며 호는 명재(明齋)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다.
그는 일곱 살 어린 시절 병자호란 시 가족이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다가 어머님이 자결하는 것을 보고 “어머님 한 분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나라를 지키겠는가”라고 탄식하며 평생을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김집에게 배운 그는 김집이 “송시열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송시열에게 배우라”고 하자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해에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우암 송시열에게 사사(師事)하며 ‘주자대전’을 배웠다.
▲ 우금치 고갯마루에 서있는 동학혁명위령탑은 1973년 천도교 공주교구가 세웠다.윤증은 훗날 송시열과 맺은 사제지간의 의를 끊고 말았다. 스승과 의를 끊은 뒤부터 송시열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소론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윤증의 학문이 높고 깨끗하다고 온 나라에 퍼지자 숙종은 대사헌, 좌찬성 등의 벼슬을 내렸다. 1909년에는 우의정의 벼슬을 내리고 출사(出仕)를 종용했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고 우의정에 올랐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렀다. 그는 83세에 학질을 앓아 그 이듬해 정월에 죽었는데, 죽기 직전에 당파싸움을 걱정하면서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하여 묘비에 “착한 선비”라고만 쓰도록 일렀다.
숙종은 그의 부음(訃音)을 듣고 개탄하며 시를 지었다.
“유림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도다. 나 또한 그를 흠모하였지만 평생을 두고 그의 얼굴보지 못 하였네. 그가 떠났다 하니 내 마음 깊이 한 쌓이네.”
윤증 고택을 지나 공주 금강의 곰나루에 이른다. 곰나루 금강은 갑오년 겨울에 삼팔선이었고, 휴전선이었다. 그렇게 가고자 했던 서울 길, 내일은 공주, 모레는 수원. 글피는 서울하며 기세 좋게 올라와 공주를 함락하고 서울로 진격해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농민군의 간절한 바람은 그 때 저 강물에 푸른 물살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갑오년 동짓달 곰나루를 건너지 못한 전봉준은 섣달에야 다리가 부러진 채 들것에 실려 저 강물을 건너갔고 김개남은 목이 잘린 채 금강을 건넜다. 김덕명, 손화중, 최경선은 오랏줄에 묶인 채 저 금강을 건넜다.
흐르는 강물을 뒤로 하고 도착한 우금치는 그 사이 터널이 뚫려 있었다.
저 평화로운 공주 시내와 이 산자락 우금고개 견준봉 일대에서 농민군과 연합군이 사활(死活)을 건 전투를 며칠 간이고 계속했다.
농민군은 이인과 판치를 선두로 제2차 공격을 시작하였다. 판치를 지키던 구상조 부대와 이인을 지키던 성하영 부대는 농민군의 막강한 공격력에 쫓기어 공주성으로 철수한 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공주 방어에만 매달렸다. 효포, 웅치, 우금치에 일본군과 정부군이 배치 되었고, 내포 방향에 있던 일본군도 공주로 합류했다. 드디어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삼면으로 포위한 다음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몸소 가마에 올라타고 홍개를 휘날리며, 기를 들고 태평소를 불며 전선을 총지휘했다고 한다. 관군의 기록인 ‘선봉진 일기’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초아흐레 날이 밝아서 적세를 상세히 탐정한 즉 각 진이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두루 잡기를 쫓고 동쪽 판치 후록으로 부터 서쪽 봉황산 후측에까지 30∼40리에 걸쳐 산위에 열진하여 사람이 병풍을 두른 것 같아 세력이 심히 창궐하다.”
칼과 낫과 몽둥이를 들고 물밀 듯 산으로 올라갔다가 짚단처럼 쓰러지고 또 쓰러짐을 보다 못한 아낙네들까지 치마에 돌을 날라다 주었던 그 싸움을 우리 어찌 잊겠는가. 훗날 전봉준은 공초에서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주 감영은 산으로 둘러 쌓이고 강을 끼어 지리가 유리한 형세를 가진 고로 이곳에 근거하여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병을 용이하게 격파하지 못함에 공주에 들어가 일본병에게 격문을 전하여 대치코자 하였으니 사세가 점전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고로 제1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한 즉 남은 자가 불과 3,000명이요 그 후 또 2차 접전 후 점고한 즉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결국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군의 지도자들은 무장한 일본군 등에 의해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남아 있는 농민군들을 이끌고 남하하였고, 원평 전투와 태인전투에서 패배한 후 동학군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 아픈 현장을 뒤로 하고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에 이르러 궁남지로 발길을 옮긴다.
궁남지(宮南池)는 무왕(武王)이 선화공주와 함께 궁의 남쪽에 조성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인공 조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궁남지를 본 따서 지은 조원이 경주의 안압지이고, 그 조원이 일본으로 전해져 독특한 일본식 조원을 만들어 낸 것이다. 버드나무가 물결에 그 잎을 흔드는 궁남지 주변에 심은 온갖 연들의 향기를 뒤로 하고 귀로에 오르며 느낀 감회는 쓰라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