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은 마이산을 빼고는 딱히 기억에 남는 곳이 없다.

전주에서 승용차로 달리면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지만, 오지라는 막연한 편견이 마음의 거리를 훨씬 멀게 한 것 같다.

가끔 무주까지 가는 도중에 멀리 오른 편으로 쫑긋 세운 말의 귀를 닮은 두개의 봉우리가 스치듯 지나친 기억만 떠오르곤 한다. 적어도 내 머리속에서 진안은 여행지라는 개념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바탕 빗줄기에 더위를 식히다

전주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내쳐 달리다보면 화심두부집을 지나 소태정고개를 오르는 널찍한 도로를 만난다. 예전엔 진안을 가기위해 구불구불한 모래재를 넘었고, 그 전에는 곰재로 다녔었다. 아직도 옛 정취를 잊지 못하는 사람은 모래재를 넘는다.

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개최하며 만든 도로를 따라 5분 가량 주행하면 완주 소양면과 진안 부귀면 경계인 소태정고개를 넘는다. 전북의 고원으로 불리며 오지중 오지로 꼽혔던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의 들머리여서 그런지 꽤나 높다. 또 새로 만든 도로지만 험준한 산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굴곡이 심하다. 달리는 차의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를 보니 지나쳐 온 길이 산 자락 뒤로 숨는다.

시계는 오후 5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늦여름의 폭염에 땀이 비오듯 흐른다. 고갯길을 오르기 위해 에어컨을 끄고 달렸더니 상의가 땀에 흠뻑 젖었다. 순간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거센 장대비가 쏟아진다. 윈도브러시를 최대한으로 높여 작동해도 앞이 안보일 정도다. 하늘까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중앙 분리대 너머로 쏜살같이 내려오던 차들이 쏟아지는 비에 속력을 줄이고 전조등을 켠다.

소태정고개 정상을 30여m 앞에두고 성산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어차피 목적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또 급한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꽉 짜여진 도심의 일상을 벗어나니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마음은 가볍다. 운전석을 한껏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듣는 빗소리가 시원하다. 차창을 조금 내렸는데도 빗방울이 안으로 튄다.

#영화 촬영 현장에 서서

성산휴게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화 ‘귀신이 산다’의 한 장면이 촬영됐다. 영화에서는 1분 정도밖에 나오지 않지만 그 1분짜리 장면을 위해 헌팅에서 촬영까지 8~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신혼여행을 가던 연화(장서희)는 타고가던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이다. 영화의 대부분을 거제도에 세트를 지어 촬영했지만, 버스 전복신을 찍기위해 제작진은 이 곳까지 왔다. 국도 옆에 자리한 평평하고 넓은 분지가 그 장면을 촬영하는 데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상진 감독의 ‘귀신이 산다’는 가장 쾌적하고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하는 집이 하루아침에 자신을 공격하는 황당한 사건에 직면한 한 남자의 심리를 따르며 설득력있고 볼거리 풍부한 새로운 스타일의 코미디 영화다.

3대를 이어온 셋방살이 설움에 '네 집을 가져'라는 아버지 유언을 인생목표로 사는 박필기(차승원).

낮에는 조선소 기사로 밤엔 대리운전으로 투잡스, 쓰리잡스를 뛰면서 결국 사회생활 10년만에 대출에 융자까지 보태 거제도 바닷가 이층집을 사는데 성공한다.

이사 첫날 문패를 박으며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부짖는다. "아버지… 나 집 샀어요~~~ 엉엉~~"

그러나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 부엌에 잘 꽂혀있던 식칼이 공중부양해 날아오고, 멀쩡했던 소파가 공격하질 않나, TV속 ‘주유소 습격사건’을 열연중이던 박영규가 필기를 노려보며 '살고 싶으면 이집에서 나가!!'라 윽박지르더니, ‘링’의 배두나처럼 TV밖으로 기어나오기까지….

이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인가.

필기는 경찰서로, 이웃에게로 귀신 곡할 사연을 호소해보지만, 필기만 몰랐던 그 집의 비밀이 있었으니 그 집에 귀신이 살고 있다는 것.

재빨리 급매모드로 변신하지만 흥정은 커녕 돈을 얹어줘도 안 산다니 가슴 답답할 노릇이다. 은행 이잣날은 다가오고 언제까지 제집 두고 여관방신세 질 수도 없던 박필기. 마침내 귀신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는데….

영화 ‘귀신이 산다’는 이처럼 내 집 마련이 소원인 필기가 어렵사리 마련한 집에 귀신이 산다는 내용으로, 자기집을 지키기 위한 필기의 고군분투와 화해가 펼쳐진다.



#마이산에 가고 싶다

쉽게 그칠것 같지 않던 장대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쳤다. 어둑어둑했던 하늘도 먹구름이 걷히자 다시 환해졌다. 비온 뒤라 바깥 공기는 시원할 줄 알았지만 더 후텁지근하다. 출발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거는데 중년 남성 두명이 갈대처럼 생긴 풀들을 한짐 가득 짊어지고 와 화물차에 싣는다. 산기슭에서 베어온 것이다.

어디에 쓰려는 것이냐고 묻자 ‘만병통치약’이란다. 그 풀들을 큰 솥에 삶아낸 물이 당뇨병, 고혈압 등에 좋단다. 남들에게 효능을 듣고 베어가는 거라고 덧붙인다. ‘과연 약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물으려다가 그만 뒀다. 어떤 절박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부정타는 말을 하고싶지 않아서였다.

이내 차를 달려 고갯길을 내려서자 오른편 멀리 시커먼 산봉우리가 열심히 따라 붙는다. 마이산이다.

‘마이’란 이름이 달리 붙은게 아니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동으로 달리는 천마 도중에 쓰러졌네 연인(내시)이 뼈만 사가고 그 귀만 남기니 변하여 두봉우리 되어 반공중에 솟아 있네’란 싯구를 남겼고 훗날 태종이 마이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마이산은 철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가을의 이름이 ‘마이’이고, 봄은 '돛대', 여름은 '용각', 겨울의 이름은 ‘문필’이다. 따라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마이산의 이름은 엄밀히 말하면 ‘용각산’이다.

비가 공기중의 먼지들을 다 씻어낸 때문인지 마이산이 눈에 가까이 다가선다. 갑자기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말의 두 귀를 닮은 거대한 바위산과 그 품안에 자리잡은 돌탑들이 궁금해졌다.

갈 곳이 결정되니 마음이 급해졌다. 어느덧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촬영 뒷얘기>

진안의 관문인 국도 26호선 소태정고개를 오르는 길은 전국적으로도 사고가 많기로 유명하다. 왕복 4차로지만 굴곡이 많고 경사가 심해 대형 교통사고도 종종 발생한다.

영화 ‘귀신이 산다’의 신혼여행 버스 추락신은 이 위험천만한 도로에서 촬영됐다. 국도 옆 절벽 아래로 넓은 분지가 있어 버스 추락과 인명구조 장면 등을 촬영하는데 안성마춤이었기 때문.

거제도에 세트를 준비한 제작진은 1분 남짓한 버스 전복장면의 촬영을 위해 멀리 이곳까지 왔다.

그러나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촬영을 위해서는 이 위험한 도로의 한쪽 차로를 통제해야 하는데 사고도 잦고, 또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이어서 관련당국으로부터 허가를 얻어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주국도유지관리사무소에서는 영화촬영을 위해 국도를 통제할 수 없다며 일찌감치 난색을 표했고, 경찰쪽에서도 “이 도고록 작년 한해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교통사고가 난 곳”이라며 협조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때문에 전주영상위원회 이세리 로케이션 팀장은 거의 한달반 가량 매일 아침 완주경찰서로 출근하다시피 해야 했고, 국도유지사무소와 소방서 등을 차례대로 돌며 끈질긴 설득작업을 벌였다. 결국 관계당국으로부터 촬영시간을 줄이고 1개 차선만 점유한다는 조건으로 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다.

장소 섭외에서 준비, 촬영까지 제작진은 8~9개월을 소비해야 했으며, 준비했던 서류만도 커다란 파일로 3개나 됐다.

한편 영화 스태프들이 이 장소를 섭외하는 도중 바로 앞에서 탱크로리가 구르며 뒤따르던 승용차들이 잇따라 전복되는 대형 교통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사고가 나자 스태프들이 달려가 교통을 통제하고 서행을 유도하는 등 후속 사고를 막기위해 투입됐으며, 다른 사람들은 사고차량에서 사람들을 구조했다.

특히 영화의 주연배우 차승원은 일가족 4명이 탄 차량의 문을 뜯고 아이들을 구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김종성기자 jau@sj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