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연재소설]에덴동산을 떠나며<29>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7.09.26 14:56

꽃은 화분에 심어지면 마침내 생기를 잃고 / 새는 새장에 갇히면 바로 자연스런 맛이 없어 지나니 / 이 어찌 산간에 꽃과 새가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고 / 자유롭게 날아 다니며 슷로 한가로이 즐김만 하랴! - 채근담 중에서 / 캔버스에 아크릴(41*27cm)<서양화가>

추석을 며칠 앞두고 우리는 인도로 떠나게 됐다. 그 우리란 오다혜와 나, 그리고 샤를 빠라디와 오천규 촌장 등 모두 넷이었다. 답사단의 구성이 아주 가관이었고, 말 그대로 구성 빠져서 영 어울리지 않는 조직이기도 했다. 나나 혹은 오다혜가 티끌만큼이라도 촌장과 동행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촌장이 그 자신을 적극 추천한 결과가 그랬다. 그 때문에 나는 우시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여행을 시작해야만 했다.

떠나기 직전, 설립자를 비롯한 몇몇 주민들이 환송을 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다혜와 빠라디는 수학여행을 떠나는 여학생들처럼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야 수학여행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닐 터였다. 촌장은 그 꿍꿍이속이 무엇인지 조금도 내색하지 않아서 오히려 불만이 많은 듯 보였다. 그런데도 왜 자청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 처지를 떠올리면서 실은 그 자신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잘 다녀오구려. 가서 우리가 찾는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구려.”

설립자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촌장에게는 그저 부탁한다고만 말했고, 오다혜와 빠라디를 향해서는 부디 건강에 유의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설립자의 주문 때문에 부담이 커지고 마음이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설립자가 만약 지상에 세우려고 하는 낙원이 죽은 가족들을 위한 사당으로서의 성격이 짙다면, 최소한 그 발상에서 비롯됐다는 게 조금치라도 거짓이 아닌 사실이라면 나는 그가 사찰 하나쯤 세우는 게 어떠냐고 물었을 때 반대하고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사찰뿐만 아니라 교회까지 한 채 더 짓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거들었어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저 먼 인도의 어떤 뚱딴지같은 공동체 따위가 그에게는 따로 특별히 소용될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그는 가족의 일은 벌써 잊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다혜는 그에게 무엇인가?….

나는 잠자코 생각에 잠긴 채 차의 시동을 걸었다. 무릇 관계가 바람직하려면, 내가 원하는 일은 분명 아니지만, 설립자에게는 오다혜야말로 세상에 유일무이한 파라다이스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죽은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탑을 쌓을 게 아니라 새로 만나는 사람들의 아늑한 품속을 낙원으로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나라면 오다혜를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인도는 그곳으로 출발하는 첫걸음을 떼는 순간부터 아예 가볼 필요도 없는 곳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잠깐 차를 좀 세워주시오. 내가 늙어서 긴장이 되는지, 원!”

촌장은 다솜터를 벗어나자마자 차를 세우게 하더니 나무숲 가운데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용변이 급해졌던 모양이었다. 긴장성 다뇨증이 아니면 노인들 특유의 증상이 분명했다. 나는 그것도 짜증스러웠다.

“낯꽃이 그게 뭐에요, 선생님!… 좀 활짝 펴보세요.”

내 운전석 바로 뒤에 앉은 오다혜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는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녀가 혀를 낼름 하고 내밀었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거울을 통해 혀끝이 사라진 부위를 자세히 훑어보자니 오다혜는 혼자서 아주 고소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그때 비로소 나도 몰래 미소를 짓게 되었고, 그리고 이윽고 내 마음속의 음울한 그림자를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촌장도 이미 노인이라는 사실을 나는 새삼 떠올렸다. 그는 거칠고 오랜 여행을 이겨내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인도는 숙소나 음식, 그리고 교통편들이 노인에게 들어맞을 리가 없었다. 요컨대 그 점을 잘 활용하면 촌장이 우리를 따라나서지 않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 나에게 유리할 수도 있겠다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촌장님,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나는 용변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뒷좌석으로 앉은 촌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빠라디는 무엇이 우스운지 내 옆자리에서 쿡쿡 웃었다. 어쩌면 그 조그만 아이는 오다혜가 혀를 날름거리던 모습을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오다혜와 나의 관계, 더 나아가 내가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는 일들을 다 눈치 채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도 걱정할 대상이 아니었다. 제대로 안다면 이해를 해줄 것이다. 아무리 어릴 지라도…. 물론 그녀는 작거나 어리지만은 않다.

다솜터에서 전주를 거쳐 인천공항까지는 무려 네 시간 이상이 꼬박 소요되는 거리였다. 곰곰 생각해보니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가 바로 전주이고 또 다솜터였다. 인천공항에서, 혹은 서울에서 시간상으로 가장 멀고 아득한 오지 말이다. 다른 지역들은 거리상 아무리 멀다고 하더라도 비행기나 KTX가 가까이 닿는 곳들이다. 나는 불현듯 전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행기나 KTX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 천치들이 아니라면 그것들을 이용할 만한 경제력이 전혀 없는 가난뱅이들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품기도 했고, 그 동떨어지고 궁벽한 깡촌이어서 설립자가 바로 그 다솜터에 깃들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어쨌거나 오다혜와 함께 가는 네 시간 남짓의 거리는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따금 내 시트 앞으로 몸을 바짝 밀착해서는 속삭이듯 묻곤 했다. 졸려요? 늦지는 않을까요? 운전 잘 하시네요? 아직 많이 남았어요? 껌 드릴까요?…. 그녀가 내 시트에 몸을 붙이고 그렇게 물을 때마다 나는 그녀를 직접 업고 가는 듯했고, 등이 또한 자꾸 근질거렸다.

오다혜는 한 번도 졸지 않았고, 빠라디는 자주 졸았으며 촌장은 내내 코를 골면서까지 잠을 잤다. 백미러를 통해서 나는 오다혜에게 자주 윙크를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혀를 낼름 내미는 장난을 거듭하곤 했다. 당장이라도 고속도로에 차를 멈춘 채로 목구멍 속 아주 깊은 곳에 키스를 퍼붓고 싶도록…. 모르면 몰라도 그녀 역시 그랬을 게 틀림이 없다.

공항은 늘 그렇듯 몹시 붐볐다. 추석 연휴를 해외에서 보내기 위해 해마다 사상 최고를 경신할 정도로 여행객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공항은 늘 시장처럼 북적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해외여행이라면 기껏 네 번이 전부였다. 중국만 두 번에 일본과 러시아를 각각 한 번씩 다녀왔을 뿐이니까…. 그나마 첫 번째 중국여행이 신혼여행이었고 나머지 세 번의 여행은 모두 학술대회에 참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니 나도 사실은 들뜨지 않을 이유가 없기는 했다.

내가 뒤늦게나마 비행기에 탑승하고서 진짜로 들뜨고 신이 났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별 생각 없이 항공사 직원이 배정해준 대로 좌석을 찾아보니 창가 쪽 두 자리가 나와 촌장의 것이었고 그 바로 앞이 오다혜와 빠라디의 좌석이었다. 촌장이 그때 들릴락 말락 입맛을 다시며 앞을 향해 입을 열었다.

“둘 중에 누가 좀 나하고 자리를 함께 했으면 좋겠구나.”

“제가 같이 앉아서 모시고 갈까요?”

그렇게 나선 건 빠라디였다. 촌장이 원했던 건 아마도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누가 자기 옆에 앉든지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오다혜 옆에 앉을 수가 있었다. 그녀가 그 순간에도 재빨리 혀를 날름거렸다.

사소하고 또한 사적인 고백이지만 나는 일찍부터 비행기를 타는 일에 취미를 붙이지는 못했다. 그건 언제나 ‘닭장차’를 연상케 한다. 다리를 뻗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자리도 모자라서 툭하면 안전벨트를 몸에 묶거나 좌석을 곧추 세우고 가야만 한다. 내가 줄담배를 피우던 시절에는 고통이 더욱 심했었다. 만약 가능하기만 했더라면 나는 비행기에서 몇 번쯤 뛰어내렸을 지도 모른다. 담배 연기나 냄새는 내가 모르면 몰라도 항공기 운항에 아마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비흡연자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항공사측에서는 왜 비행기 한쪽을 막아서 흡연실이나 휴게실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나는 언제나 탄식하곤 했었다. 좁은 비행기 안에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려는 속셈이라고?… 그래서 그게 천생 닭장차라는 것이다.

머지않아서 닭장차 비행기들은 모두 폐기 처분돼야 한다. 망치로 부속품 하나까지도 일일이 깨부숴버리고 그게 다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책을 읽거나 위스키를 받아 마시고 잠을 자면서 가거나 늘 그런 복수심 같은 것에 사로잡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다혜와 나란히 앉아서 비행기를 타보니까 그게 절대로 아니었다. 비좁은 좌석이 오히려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아인시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어느 때 예를 들었다는 일화처럼…. ‘여러분이 기차여행을 한다고 가정합시다. 만약 그 옆 자리에 어떤 미녀 한 사람이 앉아서 가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와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이 같을까요?…’

“비행기를 탈 때면 이상스럽게도 추워요. 담요 하나만 얻어주세요.”

오다혜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추위 같은 건 느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머리만 쏙 내민 채 담요를 모두 펼쳐서 몸을 가리기는 했지만 슬그머니 손을 뻗어 내 손을 끌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 손가락에 굳게 깍지를 끼웠다.

“인도에서 우리가 배워서 와야 할 게 무엇일까요?”

“나도 모르겠어요. 우선은 눈에 보이는 대로 두 눈 속에 부지런히 담아야겠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불교를 만들어 전파한 사람들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게 거의 이천년 가까이 우리 의식을 지배했어요. 지금 그 나라는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를 숭상하고는 있지만, 힌두교의 다신(多神) 숭배 방식은 불교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영향을 남겼지요. 그리고 그들은 숫자 0의 개념을 발명한 사람들이기도 하죠. 그건 어쩌면 불교보다도 더 뛰어난 발견이고 발명이었어요. 그래서 0의 개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그들에게 고마워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왜 앞선 문명의 발상지 나라들마다 오랫동안 못 살았던 걸까요? 이집트나 인도, 중국,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다….”

오다혜가 깍지를 낀 채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간질이면서 물었다. 나는 손가락을 빼내어 그녀의 치맛자락을 조금 걷어 올리고는 허벅지 위로 손을 얹었다. 그녀가 내 손등을 꼬집었지만 나는 그렇다고 손을 빼지는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못 산다는 말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인도인들은 오랫동안 운명에 순응해서 사는 일이 불행하기는커녕 스스로 아주 행복하다고 여겨왔거든요. 그리고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 가운데 70퍼센트는 어떤 식으로든 인도와 연관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거기 출신이거나 적어도 거기 있었던 어떤 것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거나…. 그러니 인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문명의 교편(敎鞭) 같은 게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다혜는 이제 곧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될 인도 땅을 그려보는 것인지 깊고 아스라한 눈빛을 한 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몸을 기울여서 잠시 그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솜사탕 같은 구름이 군데군데 떠있을 뿐 지상은 내려다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결에서는 남방의 과일 같은 짙은 향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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