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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고 귀해서 더욱 소중한 녹색광선을 만나다
[시네마 산책]<101>녹색광선 (Le Rayon Vert, 1986년)
2010년 04월 08일 (목) 김혜영 sjb8282@gmail.com
   
감독 : 에릭 로메르


존재론적 한계를 가진 유한한 인간은 항상 ‘영원’을 꿈꾼다. 이 불가능한 소망은 타자와 나의 존재가 접속할 때 가능성을 획득한다. 이때 모든 존재는 출발점이자 연속점이다. 올해 1월 타계한 누벨바그 감독 에릭 로메르(Eric Rohmer)는 홍상수 영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영원회귀 중에 있다. 홍상수 감독은 매체에서 곧잘 로메르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대단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사람들이 살아 숨쉬는 공간의 숨결을 그대로 화면에 담고자 했던 감독이다. 그런 측면에서 ‘녹색 광선’은 에릭 로메르의 느낌이 가장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노(老)감독 로메르의 노(老)처녀 델핀 ‘되기’

로메르 감독은 ‘녹색 광선’을 제작할 당시 이미 예순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고립과 좌절을 느끼는 삼십대 노처녀의 심리적 변화를 완벽하게 화면에 담는다. 이러한 심리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감성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카메라가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펜으로써 사실적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고 믿는 감독의 믿음과 노력 덕분일 것이다.

노처녀 델핀은 함께 바캉스를 떠날 친구도 애인도 없다. 친구 집에서 잠시 머물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심한 단절감에 빠진다.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은 그녀가 ‘채식주의자’인 것에 대해 지나치게 신기해하거나 빈정거리며, 델핀의 별자리가 ‘혼자 산에 오르는 여제사장’ 이라서 평생 고독할 운명을 타고 났다고 얘기한다. 치유받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결국 더 큰 상처를 받고 파리로 돌아온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친구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별장을 델핀에게 빌려준다. 그곳에서 스웨덴 여자와 어울리며 낯선 남자들을 만나는데 역시 소통하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다시 극심한 우울과 슬픔으로 가득 찬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녀는 기차역에서 만난 한 남자와 바다에 앉는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녹색광선이 내려온다.


에릭 로메르의 영원회귀, 홍상수의 자기초월

에릭 로메르는 1959년 장편 ‘사자자리’로 데뷔했지만, 누벨바그가 가장 주목 받던 1960년대에는 -몇몇 중단편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장편영화를 내놓지 못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으로서 주로 글로써 누벨바그를 지지하는데 머물렀다. 이후에도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과 형식이나 주제 면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그의 영화는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 대한 세심하고 끈질긴 탐구’라는 면에서 여타의 작품과 차별성을 갖는다. 등장인물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사건들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와 ‘이미지’의 교묘한 결합을 활용했고, ‘가시적 이미지’와 ‘비가시적 이미지’ 사이의 관계에 천착했다. 그러면서 - 언어가 아닌 - ‘이미지’에 새로운 서사기능을 부여하면서 영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작 스타일은 에릭 로메르의 방식과 흡사하다. 배우들에게 상황 설정을 해주고 쪽 대본을 나눠 주며 즉흥 연기를 하도록 한다. 인공조명을 되도록 배제한 채 빛과 사운드의 미세한 조절을 통해 영화의 사건이 전개되는 계절과 시간대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장면 연결에 페이드나 오브 랩 보다는 숏과 숏을 바로 연결하는 직접편집 양식을 선호한다. 일상적 리얼리즘을 위해서 특별한 서사적 의미를 갖지 않는 일화들로 가득 채운다. 즉 서사적 경제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느슨한 이야기 리듬과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녹색 광선’에서 배우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시나리오의 핵심적 지시사항들을 바탕으로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대화들이다. 로메르는 전형화 된 캐릭터를 피하고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비전문 배우’를 자주 주요 역할에 기용했다. ‘녹색 광선’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배우들은 연기경험 없는 일반인들이며, 심지어 극중 델핀의 가족은 델핀 역을 맡은 배우 마리 리비에르의 실제 가족이다.



이미지와 기호 - ‘녹색 광선’

델핀이 일상의 여러 순간에서 쌓아가는 녹색의 기호들은 다양하고 모호하다. 녹색은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서 그녀의 머릿속에 강렬한 하나의 비가시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실제 현상으로, 즉 구체적인 하나의 가시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렇듯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이미지 표현방식은 영화 중간 중간에 직접 가시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식보다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창출한다. 또한 실제 사건보다 정신적 사건을, 실제 이미지보다 정신적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다루려는 로메르의 창작 의도를 잘 드려낸다.

태양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 드물게 녹색 빛을 뿜어낸다. 자기 초월은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자신의 모든 지나간 경험들의 피할 수 없는 영원회귀를 기꺼이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경험을 긍정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고, 모든 도덕적, 반응적 가치 평가를 능가할 새로운 삶의 해석을 창조할 수 있다. 귀해서 더욱 소중한 빛, 우리 삶의 ‘녹색 광선’이다.

/김혜영(객원전문기자, 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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