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상하이로 떠나는 역사기행
[여행]상하이로 떠나는 역사기행
  • 임병식 기자
  • 승인 2010.04.29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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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현대 중국을 이해하려면 ‘상하이(上海)’라는 도시를 알아야 한다. 베이징(北京)이 중국의 행정 수도라면 상하이는 경제 수도다. 상하이에서는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慢慢的)’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물결에 휩쓸리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19세기 이후로는 중국의 세계로 열린 창이었다. 중국은 상하이를 발판으로 지난 30여년간의 개혁·개방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상하이는 돈이 몰리는 도시이자, 오늘날 아시아에서 가장 다이나믹한 도시다. 또 우리에게는 특별하다. 불과 100여년전 나라 잃은 한을 품은 우국지사들이 이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해 고뇌했다. 그래서 상하이 여행은 현대 중국의 변화를 실감하는 통로이자, 선조들의 숨결을 더듬는 역사 기행이다. 5월 1일 엑스포 개막을 앞두고 술렁이는 상하이를 다녀왔다.

▲ 동방명주

2010년(경인년)은 유별나다.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 몽땅 몰려있다. 줄잡아 헤아려도 금세 다섯 손가락을 채운다. 경술국치(1910년) 100주년, 안중근 의사 순국(1910년) 100주년, 광복군 창설(1940년) 70주년, 6.25전쟁(1950년) 60주년, 4.19혁명(1960년) 50주년, 그리고 광주혁명(1980년) 30주년 등이다. 여기에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1932년) 78주년이 추가된다.

기내에서 상하이를 다시 찾는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했고, 또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던 곳. ‘오늘의 우리는 그들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상투적인 말을 떠올리지만 숙연한 마음이 앞선다. 상하이는 생각보다 가깝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상하이 홍차오 공항까지 2시간 30여분의 짧은 비행을 마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수 있는 도시다.

이번 여행은 임시정부 청사, 윤봉길 의사를 기린 사당이 있는 매원(梅園)과 루쉰 공원이 주된 곳이다. 여기에 상하이의 명소인 와이탄(外灘), 난징루(南京路), 예원(豫園), 그리고 동방명주와 진모우 빌딩이 있는 신도시 푸둥은 덤이다. 홍차오 공항에서 택시로 15분 거리에 있는 ‘우중루(昊中路)’에 숙소를 잡았다. 우중루는 한인들이 몰려 있는 한인 타운이다.

거리는 한글 간판이 즐비하다. 호텔은 물론 노래방, 미장원, 사우나, 골프연습장, 발 마사지, 짝퉁 가게, 심지어 포장마차까지 온통 한글 간판이다. 짐을 풀자마자 택시를 불렀다. 호텔에서 루쉰 공원까지는 멀다. 택시 요금은 1만여원으로 저렴하다. 우중로와 중산북로를 1시간가량 달려 루쉰 공원에 도착했다. 루쉰 공원으로 가는 도로는 도심을 관통한다.

이런 까닭에 차창 밖으로 펼쳐진 고층 건물들은 경제도시 상하이의 맨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늘을 찌를듯한 스카이 라인은 중국에 대한 고전적 인상을 일거에 날려 버린다. 또 다국적 기업의 현란한 간판은 상하이가 중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향하는 국제도시임을 증거한다. 교통체증 또한 만만치 않다. 오늘날 상하이의 모습은 도시 발전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본디 상하이는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1842년 상하이는 세계를 향해 활짝 열린다. 아편전쟁에 패한 청나라는 영국의 요구에 따라 상하이를 포함해 5개 항구를 연다. 그 가운데 입지조건이 가장 뛰어난 상하이는 영국 조계로 개발된다. 이후 프랑스, 미국, 일본, 독일이 차례로 조계를 설치하면서 국제도시로써 면모를 갖춰갔다. 유럽풍 건축물이 서고, 계획도로가 뚫렸고, 거리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흥청댔다.

또 노동자들이 몰리면서 중국 공산당이 창당했다. 중국 공산당의 출밤점이 상하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신(공산당)과 물질(경제)이란 중심축이 상하이에서 비롯돼 현대 중국을 만들었다는 자긍심이다. 여기에 장쩌민, 주룽지 등 오늘날 중국을 쥐락펴락하는 인물들도 모두 상하이 출신이다. 저력 있는 도시다.



▲ 루쉰 묘

△루쉰 공원

상하이를 역사를 곱씹는 동안 택시는 루쉰 공원에 도착했다. 루쉰 공원은 상하이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다. 평일 오후임에도 공원안은 기체조하는 사람, 마작하는 이들로 북새통이다. 루쉰 공원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루쉰(魯迅)을 기린 공원이다. 루쉰 기념관, 루쉰 묘역, 루쉰 동상 등 관련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그는 사후 중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자, 사상가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학창시절 ‘아큐정전’ ‘광인일기’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는 필독서였다. 작품은 일관되게 세계화에 대한 자각과 투철한 의식개혁이다. 암울했던 청조 말, 마약과 패배주의로 혼몽한 조국을 향해 서릿발같은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새벽 찬물과도 같은 그의 지성은 나약한 정부와 몽매한 인민들을 일깨우는 외침이었다. 정부에게는 비판이요, 인민들에게는 각성이다.

‘고향’이란 단편은 산문의 백미다. 희망을 정의한 이 글은 수없이 인용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희망을 이처럼 명쾌하게 정의한 이가 있을까 싶다.

루쉰 공원은 이전에는 훙커우 공원으로 불렸다.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을 당시는 홍커우 공원이다. 그는 말년에 상하이로 옮겨와, 생전에 이곳에서 산책을 즐겼다. 중국 정부는 1956년 다른 곳에 있던 루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자본주의 상징, 경제도시 상하이에서 조국을 뜨겁게 사랑한 루쉰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시물 중 하나. 한 손엔 수류탄, 한 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촬영한 사인이 인상적이다.

△윤봉길 의사와 매원(梅園)

루쉰이 붓으로 조국을 사랑했다면, 윤봉길은 몸을 던져 자신의 나라를 사랑했다. 한국인에게 루쉰 공원에서 매원은 특별한 공간이다. 루쉰 공원 한쪽에 자리한 매원(梅園)에 들어서면 절로 숙연하다. 빼곡한 매화나무는 그의 절개를 닮았다. 그는 거사에 앞서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란 비장한 글을 남겼다.

전시물 가운데 그 글과, 또 수류탄을 들고 김구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유독 눈길을 붙잡는다. 불타는듯한 눈빛과 선 굵은 얼굴에서 24살 청년의 뜨거운 조국애가 전해져 온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당시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탄생일 기념행사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일본 요인들을 암살했다. 장개석은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경의를 표했다.

거사 이후 윤 의사는 8개월여만인 그해 12월 일본 가나자와 육군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에 처해진다. 그때 나이 24살이다. 약관을 갓 넘긴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이국에서 눈을 감지만 당당했다. 기념관에는 거사 직전 행적과 투척 장면(동영상), 언론 보도, 유품 등이 정리돼 있다. 입장료는 15위엔. 중국 정부의 의도인 지는 모르겠지만 안내판이 충분치 않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조국을 사랑했다는 점에서 루쉰과 윤봉길 의사는 지척에서 잘 어울린다. 매원을 나서는 길, 윤 의사를 처형하기 위해 매단 나무 십자가가 가슴 깊숙히 대못처럼 박힌다.



▲ 상하이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오늘은 마당로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를 찾는다. 한국인에게 상하이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일본 식민지배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공간이라는 점이다. 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 일본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1919년 4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창설됐다. 1932년 항저우로 옮기기 전까지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13년동안 활동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1939)-충칭(重慶, 1940) 등지로 옮겨다니며 광복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서다. 이 가운데 상하이 임시정부는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부조직으로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광복군 창설 등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수 차례 청사를 옮기면서도 지켜낸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의 정신은 자부심의 원천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광복될 때까지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역사학자들은 식민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청사(3층)는 한때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국정부의 지원 아래 중국 정부가 관리한다.

1층에 들어서면 김구 선생의 흉상이 반긴다. 건물 전면에는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알리는 한글이 새겨있다. 상하이를 찾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들리는 까닭에 청사 주변에서 만나는 이들은 열에 아홉 한국인이다. 내부 촬영은 금지돼 있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올해, 청사 방문은 각별한 감회를 준다. 다만, 청사를 우리 것으로 온전히 할 수 없음이 아쉽다.



▲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연상케하는 중국 상하이 신천지. 젊은 이들이 노천 까페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신천지와 예원, 와이탄

지금까지 일정이 딱딱한 역사공부였다면 신천지, 예원, 와이탄은 상하이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임시정부 청사를 나와 3분여를 걸으면 신천지다. 한자 뜻 그대로 새로운 땅과 하늘이 열리는 신천지(新天地)다. 서울의 압구정동을 생각하면 쉽다. 명품 가게는 물론 각기 멋을 부린 다양한 로드 숍이 고층 빌딩 뒤켠에 숨어있다. 젊은이들로 거리는 활기차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북새통이다.

지친 다리를 쉴겸 노천 바에서 생맥주 잔을 기울이며 망중한을 즐기에 좋다. 오가는 이들의 차림새며, 머리색깔, 언어를 감상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다시 5분여를 걸어 예원(豫園)으로 향한다. 예원은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전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도 스타벅스, 하겐다즈 등 전문점이 있지만 전통적 분위기를 거슬리지는 않는다. 현지인과 외국인이 뒤섞여 걸음 떼기가 어려울 정도다.

예원은 명조(明朝:1368 ~ 1644) 고위 관리였던 반윤단(潘允端)이 만든 개인 정원이다. 20년에 걸쳐 조성된 예원은 약 6,000평(2㏊) 넓이다. 서울 인사동 쌈지길을 방불케할만큼 붐빈다. 그러나 전통은 희미하며, 값싼 상술만 질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예원 밖에 볼거리가 많다. 도로 좌우에 늘어선 각종 공예품 가게는 다양한 볼거리와 토속적 재미를 제공한다.

예원을 나와 와이탄(外灘)로 간다.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황포강 인근 옛 조계 지역을 뜻하는 와이탄은 상하이를 관통하는 황푸강을 따라 약 1.7㎞가량 뻗어있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다양한 유럽 건축양식은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넓은 강변이 꽉찬다. 강 건너 푸둥의 동방명주와 진마오 빌딩은 주변을 압도한다. 동방명주는 아시아 첫 번째,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방송 수신탑이다.

88층의 진마오 빌딩은 중국의 개혁, 개방의 상징물이다. 푸둥 지역은 상전벽해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그 중심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동방명주가 있다. 동방명주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다. 용을 신성시하는 중국인에게 동방명주는 욱일상천하는 욕망의 상징이다. 그런 상하이에서 5월 1일부터 6개월동안 엑스포가 펼쳐진다.



△상하이 엑스포

중국은 상하이 엑스포에 420억 달러(43조원)를 쏟아 부었다. 지하철을 건립하고 홍차오 신공항을 건립하는 등 도시 인프라 구축에 380억달러를 들였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350억달러보다 더 많다. 상하이 정부는 엑스포를 통해 뉴욕, 런던, 파리에 버금가는 국제도시로 발돋움한다는 전략이다. 이미 중국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이기에 엑스포 이후 상하이는 가속도가 붙을 게 분명하다.

192개 국가와 50개 국제기구를 합친 242개 참가자, 예상 관람객은 7,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사상 최고치다. 대회장은 황푸강 양안의 푸둥과 푸시로 나뉘어 있다. 푸둥 지역 중심부에 높이 63m의 중국관이 있다. 한국관도 푸둥 지역에 설치돼 있다. 북한도 사상 처음으로 참가한다. 개최 기간은 5월1~10월 31일까지 6개월이다. 푸시 지역에는 한국기업관이 있다.

상하이 엑스포는 중국인이 세계와 만나는 거대한 학습장으로 역할이 기대된다. 중국 정부는 상하이 엑스포를 통해 국격을 높이고, 국민 수준도 올라갈 것으로 기대한다. 온통 엑스포 준비로 부산한 상하이를 떠나면서 엑스포 이후 상하이를 생각했다.

/임병식 기자 montlim@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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