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임피면 월하리. 제주 고씨 집성촌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에 들어서면 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이 마을에 고씨 성을 가진 6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외지로 많이 떠난 이유로 30여 가구만이 모여 있다.

마을에 들어서자 경로당에서는 고씨 일가 며느리들이 모여 설 명절 준비를 위한 의논을 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가운데 최고령인 신일선(84)씨는 “설 명절만 되면 며칠 전부터 음식을 장만하느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며 “누가 뭐라고 해도 종갓집 맏며느리만큼 힘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제주 고씨 종가로 5대(고원곤-고석호-고순영-고근성-고정희)째 내려오며 100년을 훌쩍 넘긴 고택의 맏며느리로 살고 있는 이묘녀(75)씨. 22살에 고씨 집안으로 시집온 이씨는 4대가 함께 사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들었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풍겼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9남매를 둔 고씨 종가는 20여명이 함께 모여 살았던 탓인지, 대식구속에서 맏며느리의 소임을 다하는 이씨에게는 밥하는 것과 빨래, 청소 등 집안일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아침밥을 해서 먹고 난 후 설거지를 하면 어느새 점심이 되고 저녁이 되었어요. 그때는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는지…” 당시를 회상하는 이씨의 얼굴엔 힘들었던 세월의 시간들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지금에서야 할 소리를 하고 살지만 그때는 몸이 힘들고 고달파도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불평불만을 털어놓지도 못했어요. 오죽하면 집안일 하느라 밖에 나가볼 겨를도 없었다”고 말을 이었다.

이곳 고씨 종가는 일년에 십수번이 넘는 제사를 드리지만 설 명절이 가장 힘들고 바쁜 시간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유교적인 제사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설 명절이 돌아오기 수십일 전부터 음식에 쓰일 재료들을 장만하느라 분주하다.

이렇게 미리 준비된 재료들을 가지고 설 명절 수일 전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며느리들이 종가 맏며느리를 중심으로 모인다. 음식을 만들기 전에 청결한 마음가짐은 기본. 미리부터 목욕으로 몸을 단장하고 집안을 청소한 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며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한다.

이씨는 “음식을 준비하며 집안 동서들끼리 모여서 남편 흉도 보고 일년 동안 살아온 시집살이 한풀이를 한다. 이런 재미로 힘들고 피곤한 것도 잊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쌀을 빻아 떡을 만들고 묵과 식혜, 강정 등을 만드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갖가지 모양의 전을 부친다. 차례상에 올릴 건강하고 야무지게 생긴 과일을 고르고 생선 등을 찌며 탕을 준비한다. 다른 한켠에서는 음식을 담을 그릇을 열심히 닦는다. 굴뚝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해는 저물고, 정성껏 장만한 음식들은 차곡차곡 모이게 된다.

설날 전에는 밤이 새도록 호롱불을 켜 놓아 조상이 오는 길을 밝히며,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날을 준비한다. 설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가 힘차게 울어대는 이른 새벽부터 차례상을 준비하기 위한 손길은 분주하다. 하지만 차례를 드리기 전에는 곳간이나 화장실, 대문, 장독 등에 간단한 제사상을 차려 집안 신들에게 먼저 예를 갖추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차례상이 마련되면 어동육서, 좌포우혜, 홍동백서 등 각 열에 따라 음식을 차리고 의관을 갖춘 어른들을 중심으로 엄숙하게 차례를 지낸다.

이씨는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드린 후에는 종가 모든 자손들이 마을 어귀에 있는 효자효부 비각을 찾아 절을 한다”며 “이어 가족들은 음식을 나누면서 조상들의 덕을 기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친척들이 종가의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하기 위해 찾아든다. 종가의 설 풍경은 항상 그렇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조상들의 옛 모습들이 점점 사라져 가는 이때, 종가를 지키면서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도 종갓집의 새벽닭은 힘차게 울어대고 있다.

/임피(군산) 글·사진= 김기현 기자 sisando@sj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