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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여행칼럼]겨울, 센트럴파크에도 삭풍은 몰아친다


기사 작성:  임병식 기자 - 2011.12.08 20:22
가까이 지내는 지인의 딸이 며칠 전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예 떠난 것은 아니고, 3주간 여행이다. 그 아이는 사노라는 이쁜 이름을 가졌다.비단 사( 紗)에 힘쓸 노(勞), 부드러움과 강함을 두루 지니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사노를 만날 때마다 고은 시인이 짓고, 가수 양희은이 노래한 ‘세노야’라는 노랫가락이 떠오른다. 사노와 세노야는 전혀 다르지만 음이 비슷해 ‘사노야’하고 부르면 ‘세노야’로 연결된다. 올해 28살, 적은 나이가 아니다. 그런데도 내겐 언제나 아이 같은 앳된 청순함으로 다가온다.

당차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다. 전형적인 신세대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도 깊다. 이름 그대로 부드러움과 강함이 어울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평양을 건너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다. 대학을 다니던 도중 귀국해 한국에서 공부를 마쳤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산 까닭에 얼핏 보면 냉정하다. 한창 엄마 품에서 응석 부릴 나이에 혼자 떨어져 생활했으니 그 외로움을 짐작할만 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명랑 소녀로 자랐다. 대학졸업 후 한 차례 낙방 끝에 올해 의학전문대학원에 합격했다. 그 끈기가 놀랍다.

사노는 미모와 지적 역량을 갖춘 보기 드문 재원이다. 이번 미국 여행은 또다시 시작될 빡센 의학전문대학원 공부에 앞선 일종의 보상 휴가(?)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 밀쳐두었던 수다를 떨고,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한 것이다. 출발하기 전날, 점심 식사를 했다. 짧지 않은 여행길에 오르는 그에게 당부와 격려의 말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염치없게 오히려 점심을 얻어먹고 말았다. 한사코 말렸지만 요지부동이다. 영어학원 강사 급여를 받았다며 고집이다. 염치는 없었지만 대견한 생각에 흐뭇했다.

이런저런 부탁을 늘어놓는다. 차조심, 사람조심, 감기조심 등등. 또 도착하면 문자 메시지라도 보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문득 ‘어느덧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하는 생각이다. 잔소리에 불과할터인데도 진지하게 경청한다. 학창시절은 물론 사회생활을 하면서 해외여행을 떠나기 전, 부모님은 내게 이런저런 당부 말씀을 늘어놓으셨다. 귓등으로 흘리면서 노인네의 잔소리로만 여겼다. 그런 잔소리가 어느덧 내 입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입장이 바뀌고 보니, 그건 잔소리가 아닌 가슴에서 배어나오는 애정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지난해 이맘때 뉴욕을 다녀왔다. 20여일동안 가족과 함께 LA, 뉴욕, 보스턴, 애틀란타를 돌았다. 겨울임에도 비교적 따뜻한 LA와 달리 동부에 위치한 뉴욕, 맨해튼의 칼바람은 매서웠다. 고층 빌딩 사이를 헤집고 파고드는 찬바람은 온몸을 꽁꽁 얼렸다. 리처드 기어와 위노나 라이더가 연기한 영화 ‘뉴욕의 가을’에서 센트럴파크는 그림같은 배경을 만든다. 하지만 겨울, 센트럴파크는 지갑은 가볍고, 길떠나온 여행자에게는 삭막한 공원에 불과하다.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게 즐겁고, 흥미로웠다.

지금도 맨해튼에서 하루 나들이를 마치고 뉴저지에 있는 후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메이시 백화점 입구에서 추위에 떨며 차를 기다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런 기억마저 감미롭게 재생된다. 사노의 뉴욕여행은 1년전 추억을 한꺼번에 불러왔다. 맨해튼의 밤거리가 그립고, 브로드웨이와 타임스퀘어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이방인들, 그리고 꺼지지 않은 욕망의 불빛까지 모든 추억들은 향수가 되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사노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맨해튼에 있는 애플스토어와 뉴욕의 다양한 풍광들을 사진으로 담아오라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직접 설계한 애플스토어는 뜨거운 용광로와 같다. 밤새 불을 밝히는 이곳은 IT를 신봉하는 신세대들로 북새통이다. 스티브 잡스 사망을 계기로 맨해튼 애플스토어 관련 글을 쓰고 싶지만 사진이 없다. 그래서 부탁했다. 뉴욕에 도착한 사노는 카카오톡을 통해 무사히 안착했음을 알려왔다. 이어 뉴욕과 맨해튼의 거리 풍경을 보내왔다. 문자를 통해 맨해튼의 밤거리와 센트럴파크의 삭막한 풍광이 살아난다.

1980년대 해외에서 국제통화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카카오톡을 통해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다. 그것도 무료다. ‘세상 좋아졌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말을 하면서 또 ‘나이들었구나’하고 생각한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언제나 설레이며,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듣는 것도 행복하다. 사노의 여행을 통해 겨울 센트럴파크를 떠올린다.

/임병식 기자 montlin@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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