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에 느림이 주목 받고 있다. 숨가쁜 삶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걷기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다. 걷기 열풍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많은 옛 길들이 복원됐다. 도내에도 적지 않은 길들이 도보 여행객의 입줄에 오르내리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이 대표적이다. 또 해변을 따라 걷는 부안 마실길도 이름 높다. 이야기가 풍성한 군산의 길들도 매력적이다. 옥산수원지를 도는 구슬뫼 길을 비롯해 탁류길, 금강길, 동국사길 등 저마다 독특한 색깔을 입고 있다.

진안 곰티재 길은 이미 트래킹족들 사이에 인기 높다. 전주에서 진안을 가려면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그 산을 따라 뱀이 똬리를 틀듯 구불구불 길을 냈다. 멀리서 보면 명주실을 풀어 헤쳐 놓은듯 하다. 소양을 지나면서 시작되는 길은 산으로 곧장 뻗어 있다. 진안으로 가는 길은 네 개다. 곰티재, 모래재, 국도 26호선 보령재, 익산~장수 고속국도다. 가장 먼저 뚫린 길이 곰티재 길이다. 한자로는 웅치(熊峙)다. 곰티재 길은 사람들이 오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난 길이다. 지금처럼 포장 도로가 뚫기 전, 숲을 헤치고 산길을 냈다.

이후 신작로로 바뀌었다. 울창한 숲 사이로 난 길은 험하다. 한낮에는 햇볕조차 들지 않는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에서 한참 시간이 흘렀지만 혼자 걷기엔 무섭다. 완주군 소양 신촌마을에서 시작해 진안군 부귀 장승마을까지 길은 12㎞에 이른다. 자동차로 올라도 좋고 걸어서 넘어도 좋다. 트래킹을 원하면 시내버스를 타고 원신촌 마을에서 내리면 된다. 고개를 넘으면 진안 장승마을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하면 된다.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발해 걸어서 곰티재를 넘고, 귀가하는데 꼬박 하루 품을 팔아야 한다.

하지만 자동차를 이용하면 반나절로 족하다. 갈 때는 곰티재, 올때는 모래재를 이용하면 훌륭한 드라이브 코스다. 원신촌마을에서 시작되는 곰티재 길은 설레이게 한다. 울창한 숲속으로 난 길을 지긋시 바라보면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듯 해서다. 길은 비포장이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주와 진안을 잇는 길은 곰티재 길이 유일했다. 만덕산(해발 761m)의 산세가 곰을 닮아 곰티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길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못먹고 어렵던 시절, 사람들은 완행 버스에 고단한 몸을 맡긴 채 산을 넘었다.

덜컹거리는 버스는 콩나물시루처럼 많은 사람을 태우고 아슬아슬 산을 넘었다. 산골에서 전주로 유학간 까까머리 중학생부터 도회지에 직장을 둔 어른까지 사연도 갖가지다. 그러다 큰 사고가 났다. 1966년 6월 6일 진안에서 출발한 버스는 200m 낭떠러지로 굴렀다. 공교롭게도 기독교인들이 불길하게 생각하는 6666이 겹친 날이다. 정원 45명인 버스에는 무려 71명이 타고 있었다. 산 중턱에서 발견된 버스는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15명이 숨지고 54명이 다친 대형 참사였다. 희생자 가운데는 대처로 유학간 촉망받던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수개월 뒤 같은 회사 버스가 다시 산 아래로 굴렀다. 이번에도 5명이 숨졌다. 사람들은 원혼들이 이승을 떠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고 지점에서 큰 굿판을 벌이고 원혼을 달랬다. 곰티재 참사는 새로운 도로 개설의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뚫린 길이 모래재 길이다. 모래재 길은 포장도로다. 하지만 모래재 길 역시 잦은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곳에서도 1989년 완행 버스가 추락해 8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겨울이면 눈쌓인 모래재를 넘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한 치기였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눈이 오면 아예 넘기를 단념했다.

모래재 길은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대회(무주)를 앞두고 국도 26호선(소태정)이 개설되면서 잊혀졌다. 새로 뚫린 4차선 국도는 험한 산을 거뜬히 넘었다. 하지만 이 길 역시 겨울이면 소태정 고개 부근에서 거북이 걸음을 할수 밖에 없다. 국도 26호선은 2001년 익산~장수 고속국도가 개설되면서 통행량은 현저하게 줄었다. 다시 곰티재 길로 돌아가자. 곰티재 참사를 떠올려서인지 오싹하다. 하지만 곰티재를 넘는 경험은 색다르다. 원신촌마을 초입의 구멍가게부터 친근하다. 가게는 문이 닫혔다. 주변으로 옥수수 밭이 뙤약볕 아래 있다.

산길에 접어들면 을씨년스런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방치된 지 오래된 아파트와 기도원이 잡풀 속에서 을씨년스럽다. 완주군의 관심이 필요하다. 기도원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간간히 도보 여행객을 만난다. 산길은 적막하다. 이름모를 산새 소리에 귀를 씻고, 야생화에 한 눈을 팔다보면 어느덧 고갯마루다. 고갯마루에 미치기 전, 성문처럼 직벽으로 선 암벽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일품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양희은의 「한계령」이 떠오른다.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네. 지친 내어깨를 떠미네.’

문득 나를 돌아본다. 구불구불 지나온 길이 사람의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숱한 수렁을 지나고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지면서 어쨌든 고갯마루에 서 있다. 지금의 나를 이곳에 있게 한 지나온 길이 고맙고 소중하다. 고갯마루에는 이정표가 있다. 한쪽은 곰티재 길, 다른 쪽은 진안 부귀면을 알린다. 곰티재 길이 끝나는 곳부터 진안 부귀 마을이다. 이 길을 옛사람들은 하릴 없이 두 발로 걸어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문명사회가 고맙기도 하다. 고갯마루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인생처럼 산도 골과 마루가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