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안겨 대지를 품었어라, 금산사
산에 안겨 대지를 품었어라, 금산사
  • 김판용 시인.금구초중 교장
  • 승인 2015.01.2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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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이야기가 있는 전북의 사찰]금산사 모악산(상)
▲ 눈으로 은산사가 된 금산사 전경



눈이 내리는 새벽이었다. 누가 부른 것처럼 일어나서 금산사로 향했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승용차 헤드라이트 앞으로 부서지는 분발이 사뭇 어지럽다. 거기에 기온까지 떨어져서 노면도 얼어붙었으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길이다. 그러나 금산사를 입체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뚫어냈다. 경내에 이르자 모악산 너머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동이 터 오는 것이다. 이제 조용히 산사가 어둠을 털어내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은 미륵전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대로 대적광전으로 이어진다. 아날로그로 펼쳐지는 아침이 오는 풍경이 한편의 영화처럼 빛난다.

금산사는 금산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가 모악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금산이다. 정상의 높이가 794.5m인 이 산의 ‘금’은 으뜸을 나타내는 ‘곰’에서 왔다. 곰은 ‘검’으로 ‘금’으로, 또는 ‘엄’으로 음이 변했다. 큰 산을 ‘엄뫼’라고도 한다. 엄지에서 ‘엄’이 제일, 최고를 나타내듯 엄은 위대하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로 보면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라는 의미의 모악은 엄뫼와 같은 것이다.

금산사하면 황금빛을 연상한다. 금(金)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금은 풍요의 상징이다. 김제평야라는 거대한 생산력이 없었다면 금산사라는 대찰은 들어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사라 하지만 실제는 평지 사찰인 금산사는 풍요로운 호남평야의 지리 문화적 산물이다. 그래서 금산사를 떠올리면 자꾸 가을 김제평야의 황금들판이 겹쳐진다. 황금빛 금산사라고 여기는 사찰이 이렇게 눈이 덮이면 어떨까? 아, 이런 날은 은산사가 아니겠는가? 하얀 눈이 쌓인 산사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듯 무직한 침묵으로 다가왔다.

우리나라 불교사적으로도 금산사의 족적은 크다. 우선 불교계의 위상만 봐도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 산하에 60여 곳이 넘는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래서 금산사 자체는 그대로의 종교인 것이다. 종교(宗敎)라는 말이 금산사처럼 잘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종교의 ‘종(宗)’은 깨달음을 이르는 말이고, ‘교(敎)’는 가르침을 일컫는다. 서양의 믿음을 나타내는 'Religion'을 일본에서 종교라고 번역한 것으로 불교적 용어를 차용한 것이니 어쩌면 금산사가 종교라는 말은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금산사를 왜 종교적이라 하는지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종교는 믿음의 근원이고 의지처이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사명도 있다. 우리 전북의 사상적 거처를 이야기하라면 나는 두말할 것 없이 금산사를 내세운다. 물론 전동성당도 있고, 선운사도 있다. 그러나 개산의 기원이나 행적에 있어 금산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개산 1400년, 이 엄청난 역사가 주는 무게감은 그 무엇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금산의 또 다른 이름 모악산 품에 안긴 사찰들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 사찰 역시 금산사이다. 모악산 정상을 비롯한 요지 대부분이 금산사 소유이기도 하다. 산은 물을 평야로 내려 보낸다. 그러니까 평야는 산이 없으면 사막이 되는 것이다. 김제평야를 살리는 젖줄은 이렇듯 모악에서 시작된다.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곳, 그래서 김지하 시인이 우주의 배꼽이 점지했던 곳에 금산사는 우뚝 서서 1400년의 세월을 건너온 것이다.

이제 금산사의 개산(開山)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모악산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터가 용추로서 깊이를 측량하지 못하였다. 신라 때 조사가 여러 만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대전을 세웠다 한다. 네 모퉁이 뜰 아래서 가느다란 간수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지금도 누각은 높게 빛나고 골짜기 마을은 매우 깊숙하다. 호남에서 크고 이름난 가람이다. 전주부 치소에서 대단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금산사만의 것이 아니다. 백제말 위축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대규모 불사인 미륵사 창건 설화에도 연못을 매웠다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중환이 택리지를 쓰면서 전라도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그런 만큼 위 내용이 신빙성이 있느냐는 것인데 이중환의 말대로라면 금산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다고 돼 있다. 당시 법왕의 자복사찰로 왕실의 명에 의해 지어졌고, 또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특별한 사찰이었던 것이다.

▲ 금산사의 노을


창건은 백제 때였지만 나라가 망하고 나서 그리 번창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다시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된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을 통해서였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이 내용을 적고 있을 것이다. 나라가 망한 백제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사찰로서의 금산사는 그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망한 백제의 등불이었고, 억압에서 해방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샘물과도 같은 사찰이었다. 그리고 모든 서원을 한 몸에 받은 이는 바로 진표율사였다.

진표율사는 금산사 숭제법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절실한 수행을 원했던 그는 27세 때 변산의 불사의암(不思議庵)에 들어가 전념했다. 불사의암은 바위에 의지해 지은 수행처로 백척간두처럼 위태로운 곳이다. 지금도 변산에 가면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의 서원이 얼마나 깊었는지 17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의 법력을 익히 아는 경덕왕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 직접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중창을 위해 조(租) 7만7천 석(石)과 명주 500 단(端), 황금 50 냥(兩)을 보시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신라왕실에서는 망국의 한이 서린 백제인들의 동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진표율사를 후원하는 일은 곧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백제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진표율사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런 왕실의 후원과 6년의 대역사를 통해 금산사는 옛 백제 땅의 중심 사찰로 다시 서게 된다.

눈 덮인 경내로 또 한번 눈발이 지난다. 문득 추운 눈발 속에서 자신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불심으로 극복해보려는 백제 유민들의 봉두난발이 떠오른다. 그 광경은 호남평야를 건너가는 동학군으로 다시 살아났다가, 넓은 평야를 가졌어도 궁핍해져만 가는 오늘날 농민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 누가 저들의 눈물을 닦아주었던가? 닦을 수 없어 애절하게 어디에 의자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던가? 메시아의 성전 미륵전을 보니 눈으로 온통 하얗다.

/김판용(시인.금구초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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