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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를 깨지 않고서는 도저히 새로워질 수 없다

[최용철이 읽고 쓰는 ‘수상한 책, 불편한 진실’] <60> 왜 금기를 깨지 못할까

사람은 몸으로 살아간다. 몸으로 살아가기에 섹스가 가능해진다. 섹스는 다른 몸을 소유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섹스체위는 다른 몸을 소유하는 방식이다. 섹스체위는 다른 몸동작과 비교해 특별하다. 섹스체위는 그래서 ‘슈퍼포지션’(super positions)이다. 슈퍼포지션에는 유혹이 따른다. 어떤 몸이 다른 몸을 끌어당김이 유혹이다. 유혹은 언제 어디서나 이뤄졌다. “어제는 습한 동굴 속이나 대초원 덤불 뒤에서 오늘은 소란스런 술집이나 거리 한구석에서 유혹이 시작된다.” 기원전 2000년 경 점토서판에 시 한편이 새겨졌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즐길 수 있도록 음부를 드러냈다.......6일 낮과 7일 밤 동안 쉬지 않고.......여자를 소유했다.”(『체위의 역사』Super Positions 안나 알테르 외 Anna Alter 지음, 문신원 외 번역, 열 번째 행성, 2003, pp.21-22)

남자와 여자가 서로 몸을 소유하는 방식은 단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무려 “현존하는 방식은 32만 2,633가지 체위”(p.153)이다. 그럼에도 “인간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금기를 정하고.......일부 체위를 배척하기도 한다.”(p.20) 인간에게는 ‘선교사체위’만이 이른바 ‘정상’이다. 이 체위로 남녀는 서로 엉덩이를 감추고 얼굴을 마주 보면서 성기를 결합한다. ‘선교사체위’로 불린 것은 가톨릭 신부들이 식민지 원주민들에게 가르친 체위였던 탓이다. “찌는 듯 덥고 습한 아메리카에 상륙한 신부들은, 알몸으로 생활하면서 어머니와 누이 등 여러 명의 여자들과 기상천외한 자세로 서로를 희롱하는 원주민들에게 당장 성스러운 체위를 가르치고 싶었다.”(p.31) 이 체위를 ‘신성하고 성스런 체위’로 규정했다.

선교사체위는 인간 4명 중 1명이 선호하는 체위이다. 그것은 종족번식에 유효하다고 전해진 체위이다. ‘선교사체위는 정액을 낭비하지 않고 종족을 알뜰하게 열매 맺게 해 주’기 때문이다. “소중한 정액이 여성의 몸 밖으로 흘러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p.28) 그렇지만 선교사체위는 가부장체제에서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고 있음을 몸으로 증명한다. 선교사체위로는 여성이 남성위로 못 올라가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적을 자기 몸 아래 눕힐 때, 자신이 좋을 대로 그리고 편할 대로 그 적을 정복하고 길들일 때 남자가 거두는 승리는 더욱 크다.”(pp.30-31) 선교사체위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는 것을 과시한다.

어느덧 “선교사체위를 포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자 자연을 거스르는 태도이다.”(p.32) 선교사체위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다. 선교사체위는 인간본능을 억압하면서 ‘관계 자체의 아름다움’을 제거한다. “선교사체위는 욕망과 환상을 죽인다.”(p.36) 더욱이 “선교사체위만을 고집하는 것은 인간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위대한 활동을 단조로운 위선으로” 만든다. (p.36)

선교사체위로 말미암아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게 되었다. 인간 말고 다른 “모든 포유류 동물은 몸을 핥은 후에는 한결같게 후배위로 짝짓기를”하기 때문이다.(p.39) 오래 전 인간도 후배위로 짝짓기를 했었을 것이다. “일부 여성 조각상과 구석기시대 미술품에서 인류최초 여성은 몸을 구부려 파트너에게 몸을 바치는 동물적 자세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p.40) 수렵생활을 했던 인간조상은 ‘아름다운 엉덩이’를 선호했었을 것이다. 인간남성 조상들은 ‘여성들을 후배위’로 소유했었을 것이다.(p.40)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런 인간체위는 선교사체위로 바뀌었다.

인간은 이제라도 편견을 벗어야 한다. 인간도 역시 동물이 아닌가. 인간에게 고유한 체위가 있을 턱이 없다. 인간도 다른 동물 암수처럼 관계 맺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람. 언젠가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한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었다. 흥미로운 건 부적절한 관계였다기보다 오히려 그 남녀가 맺었던 체위였다. 그 체위는, 남자가 다리 사이에 여자를 가두고, 여자는 입으로 남자를 가두는 ‘펠라치오’였다. 펠라치오는 미국 대통령만 선호한 체위가 아니었다. 고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도 그랬다. “반쯤 기대어 누운 황제가 웅크리고 앉은 한 여인의 음부를 핥고, 또 다른 여성의 그의 성기를 빨고 있다.”(p.51) 펠라치오는 오늘날 ‘21세기에 들어서 모든 이들이 즐길 권리’를 주장하는 체위가 되었다.(p.48)

편견을 버려야 새로워진다. 편견을 버려야 ‘쿤닐링구스’도 가능하다. “여성은 똑바로 누워있고 연인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누워 다리를 들어 올려 벌린다. 그리고 혀로는 항문과 음순을 공략하고 손바닥으로는 가슴을 쥐고 흔들”수도 있다.(p.62) 뿐만 아니다. 남자는 여자의 입에 자기 성기를 집어넣고 남자가 여자 넓적다리 사이에 머리를 넣을 수도 있다. 어디 ‘69’체위 뿐일까. (p.65) 여성이 남성을 말로 삼아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헥토르의 말’을 탄 여성은 남성보다 늠름하다.(p.67) 반면 “여성은 두 젖가슴을 꽃다발 모양으로 만들어 그 사이에 남성 성기를 놓는” ‘넥타이’ 체위로 모성애를 발휘할 수도 있다.(p.83) 인간이 서로 몸을 소유하는 체위는 다양하다. ‘선교사체위’가 인간에게 유일한 체위는 아니다. 그것 말고 다른 체위를 상상하는 것은 이제껏 금기였다. 금기는 깨져야 한다. 금기를 깨지 않고서는 도저히 새로워질 수 없다. 새로워져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전북대 윤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