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전주 역사 새긴 작은 비석, 세상 기준점 되길 바라며

[기획] 전주 한옥마을 다시 보기 <19> 자만동금표와 전북 도로 원표

기사 작성: 글=이종근·사진=오세림 기자 - 2016.03.02 16:17

전주 한옥마을엔 알싸한 풍경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이 있고, 맑은 물이 있고, 고색창연한 건물이 있고, 연꽃으로 수놓인 화려한 연못이 있습니다. 때론 안개가 아스라하고, 때론 사람들의 소리로 왁자지껄합니다. 시나브로, 한옥마을을 향해 나아갑니다. 든든한 남천교와 싸전다리(橋)가 저마다 다른 다리(脚)를 받치며 풍경 속으로 데려다 줍니다. 한옥마을의 다리는 다시 묵묵히 우리를 삶의 이편으로 싸목싸목, 싸부작싸부작 데려다 주며 구구절절 사연 없는 곳이 없다고 항변하는 눈치입니다.

△자만동 금표

혹시 금표(禁標)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예로부터 출입금지를 알리는 금표를 푯말로 세워 채석, 벌목, 개간 등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조선조 연산군에게 경복궁의 후원 경회루는 속된 말로 놀기에 너무나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편을 보면 유독 경회루가 많이 등장합니다. 연산군은 어명을 통해 “지금 궐 밖의 지대가 높은 지역을 조사해, 혹 그곳에서 이곳 궁궐 안이 보이는 건물이 있다면 모두 쫓아 내라! 그리고 그 지역에 금표를 치고 어느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9년, 36년 1899 대한 광무 3년 1월 25일(양력)과 7월 11일의 기록에 전주의 금표 이야기가 소개됩니다.“이재곤에게 자만동, 오목대, 완산에 모두 비석을 세우도록 명했다. 완산의 돌은 황방산에서 떠다가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자만동과 오목대는 형편상 품질을 가려서 떠와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목대를 지나 오목교를 건너 이목대를 지나 승암마을로 발길을 옮깁니니다.한옥마을 외곽에 자리한 자만마을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평범한 달동네로 대학 생활을 할 때 친구가 자취를 한 곳이어서 수백 차례를 방문했었는데, 지금은 예전의 모습과 너무 다르군요. 최근 들어 전주시가 한옥마을을 관광지로 육성하면서 이곳에 벽화마을을 조성, 덕분에 요즘 이곳은 전주를 찾는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가 됐습니다. 화려한 채색의 벽화는 칙칙한 동네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주민은 산뜻한 분위기로 살맛이 나게 됐고 방문객은 벽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듭니다. 누구나 떠나고 싶어하던 이곳이 누구나 살고 싶어하는 동화마을이 됐습니다. 사람과 사회를 바꾸는 예술의 힘이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 전라북도 도로원표

벽화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승암마을엔 자만동(滋滿洞)금표(완산구 교동1가 자만길 54-43)가 한옥마을을 지키는 장승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이 금표는 태조의 5대조 목조 이안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승암산 자락의 출입을 금지하기 위해 조선 고종때 만든 표지석입니다. 이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태어나고 자랐던 장소임을 지칭, 이곳에 대한 출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다름 아닙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라는 5자의 해서 글자로 쓰여져 있으며, 규격은 높이 62㎝ 폭31㎝ 두께 12㎝로, 석질은 쑥색의 화강암입니다.

자만마을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30년 전에는 이 금표가 현재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2미터 지점에 있었으며, 현재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은 15년쯤 전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마을주민 역시 비석을 없애지 말고 잘 보관하라는 말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 금표는 서자와 간지 기록이 없어 연대 추정이 불가능하지만, 조선말기인 1900년경에 오목대비와 이목대비, 그리고 조경단비가 제작될 때 같이 세운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은 "자만동금표는 오목대와 이목대, 그리고 목조대왕구거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당시에 새로운 표석을 세워 이 지역의 벌목, 개장, 채석 등을 금하는 경계석으로 삼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자만동 금표는 안타깝게도 한옥마을 지도에 표시조차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좁은 골목에 끼어 있는 작은 비석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금표를 충분히 스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무성의 하게 놓인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 자만동 금표

△팔달로 기업은행 앞의 도로 원표

전주시 옛날 미원탑 사거리를 아십니까. 팔달로 기업은행 입구 앞 ‘전라북도 도로 원표’ 표지석이 세워진 곳을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도로원표(道路元標)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도로의 기점, 종점 또는 경과지를 표시한 것으로 도로법 제2조 제1항 4호에 도로의 부속물로 정해져 있으며, 쉽게 말해 도로 원표를 기점으로 전국 시·군 간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 원표는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원래 일제강점기 때는 도로명을 1, 2, 3등급으로 나누어 불렸으나, 광복 이후 미군이 들어오고 나서 군용지도에는 각기 다른 숫자로 표시하면서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에 지난 1967년 전국 노선 표시를 동일하게 하면서 현재의 국도1호선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원표의 뒤로 가봅니다. 기업은행의 정문 입구 화단에 선 장방형 원표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지상고) 1m40㎝, 가로 세로 25㎝×25㎝ 크기입니다. 들여다보면, '1964년 10월 10일 전주라이온스크럽 건립'이라고 정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워낙 글씨를 깊이 파고 바탕이 좋은 화강암인지라 마치 새 것 같습니다.

"보통 비석 글씨는 음각이 얕고 'V'자 형태로 가파르게 파지만 이 글씨는 몽글몽글한 'U'자형으로 깊이 새겼지. 돌도 최상의 황등석으로 주문했어." 화강석 원표 건립을 제안한 유승국(의사·전주라이온스클럽 창립멤버)씨의 회고를 들었다는 전 언론인 임용진씨의 설명입니다.



	▲ 자만동 전경

애시당초 원표는 돌이 아닌 나무 재질이었다고 합니다.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20m 떨어진 우체국 앞에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던 것을 유씨 등이 제안한 까닭에 '백년도 더 갈' 돌로 만들어 다시 세운 것으로, 위치를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은 현재 자리가 구 시청 정문이었기 때문입니다

. 이 원표는 정갈한 예서체 글씨는 석당 고재봉의 휘호라고 전하며, 원래의 길이 6척(1m80㎝)짜리 돌로, 40㎝는 땅에 묻혔습니다. '목포 173천, 부산 169천, 신의주 745천, 청진 964천, 서울 272천, 평양 525천'. 여기서 ‘천’이란 '㎞'를 뜻하는 한자로, 원표 옆과 뒤 3면엔 이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난 1960년대가 그립습니다. 당시 전주는 신의주, 평양, 서울, 부산과 함께 이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을 증거하는 원표가 지금은 정원수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제 전주가 한국의 10대 도시 축에 들지 못해서 원표가 꼭꼭 숨어버린 것인가요. 도로 원표처럼 누구나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그 꿈은 세상의 모든 길에 우선합니다. 세상의 기준점이 정직, 신뢰, 배려, 용서, 양보, 경청란 단어로 마름질이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30여년 동안 도로 원표 인근의 미원탑 주변을 서성이던 기자의 머리 위에 흰서리만 무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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