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창] 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칼춤 용담검무
[전북의 창] 수운 최제우와 동학의 칼춤 용담검무
  • 장 효 선 명지대 교수, 용담검무 명인
  • 승인 2018.10.1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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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정월 남원 교룡산성 내 선국사 은적암 의 겨울은 유난히도 차갑고 추었던 것 같다. 더구나 당시 관군에게 쫓기는 수운 선생은 춥고 배고품이 오죽했으랴. 그렇지만 수운 선생은 “홀홀단신으로 추운 곳이나마 찬바람에 몸을 가리고 얼은 몸을 녹이니 새삼 인간의 정이 스며오는데 불철주야 세상을 떠돌며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천신만고 끝에 얻은 무극대도를 펼치니 이 고통 중에 또한 그럴듯한 기쁨이 함께하고 우주와 한울의 조화라는 것이 한없이 아름답도다”라고 노래했다.
민족자주정신이 깃든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당시 문명(文名)을 날리던 선비 근암공(近菴公) 최옥의 만득자(晩得子)이다. 수운 선생이 살던 시대인 19세기 중엽의 조선조는 매우 어지러운 때였다. 부패한 관료와 당쟁(黨爭)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힘으로 들어오고 있는 서양의 세력으로 인하여 문화적인 혼란과 함께 국가적 민족적 위기를 겪고 있던 때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민족적, 시대적 위기와 어려움을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큰 뜻을 품은 젊은 수운 선생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남원 은적암에서 도(道)는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검결(劍訣)을 지어 칼춤을 추면서 그의 무극대도를 실현코자 했다. 그러나 그 칼춤이 혹세무민과 반역을 꾀 했다는 이유로 수운 선생은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된다. 당시 수운 선생을 문초 하고 처형한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 1801~1868)이 올린 장계(狀啓)는 다른 사안보다도 검결과 칼춤 즉 용담검무에 관계되는 내용 위주로 반역을 꾀하였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수운이 처형당하게 되면서 민족을 구하고자 염원 했던 동학의 칼춤 용담검무는 그 존립과 이어짐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고 당시 동학을 공부하며 용담검무를 연마하던 많은 동학 교도들은 뿔뿔히 흩어지게 되고 결국 숨어서 남모르게 추는 칼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이어져 온 용담검무가 157년이 지난 이제는 민족의 등불이 되어 새로운 문화로 오늘날 계승되고 전승되어지고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전통의 가치와 민족 고유정신의 발휘가 요청되는 이때, 민족의 자주정신과 상무(尙武)정신, 그리고 민족의 혼이 깃든 용담검무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가장 주된 이유는 수려한 몸의 움직임과 함께 발생하는 파장에 있다. 그 파장은 개인적인 차원으로부터 발생하여 문화적 영향과 우주적 영향을 갖는다. 그러나 오늘날 전통무예는 본래의 정신이 깃든 몸동작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우아하며, 장엄함마저 잃어버린 채 잊혀져가고 있음은 안타까움을 지나 우리의 소중함 마져 잊었다는 자괴감에 들게 한다. 연구 결과 용담검무는 문화적, 예술적, 건강적 가치를 갖고 있는 소중한 문화재산이라고 한다. 
물질만능과 널리 이로움의 홍익 정신을 잃어버리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오늘날, 우리들을 일깨워주고 또 그 정신과 몸짓이 깃든 용담검무 수련은 이를 극복하고 우리를 되찾게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따라서 용담검무의 문화적 가치의 보존과 널리 퍼뜨림은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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