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7m의 봉지 커피
4,507m의 봉지 커피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4.2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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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동아프리카 르완다에서 가장 높다는 카리심비(4,507m)산을 올랐다.
국립공원 입구에서 시작한 산행은 약 4시간을 숨가쁘게 올라 4천m 지점의 베이스캠프에 이른다. 베이스캠프라고 해봐야 양철 지붕에 나무로 바닥을 깔아 놓은 정자 같은 곳이다. 산 밑은 30도가 웃도는 땡볕인데 산정상은 온 몸이 에일듯한 겨울 추위다. 출발 지점에서의 반팔 복장은 어느새 두툼한 겨울 옷으로 바뀌었다. 불과 네 시간 만에 여름에서 겨울로 변했다. 오후 5시 무렵인데 해는 벌써 졌다. 이른 저녁을 먹어야 한다. 비룽가 산맥으로 둘러싸인 첩첩 산중은 랜턴 외에는 아무 불빛도 없는 칠흑 어둠이다.

포터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들의 저녁을 먹고 있다. 식사라고 해봐야 옥수수를 모닥불에 구운 것과 바짝 마른 빵 조각이 전부였다. 모닥불 주위에는 포터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열 댓 명의 군인들이 추위를 쫓으려고 눈만 빼꼼이 내놓은 군복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 곳 카리심비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은 출발점에서부터 군인들의 무장 호위를 받는다. 몇 년 전에 이 산을 등반하던 외국인들이 콩고 반군에게 납치 당한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다. 우리의 중위급인 소대장의 통솔로 전원 소총을 소지하고 4명은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그들이 저녁 식사로 옥수수를 구워 뜯어먹고 있는 동안 우리는 염치없게도 고기를 구워 먹었다. 등산객들이 늘 그런 양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은 듯했으나 우리는 제 발에 저린 양심으로 계면쩍기 이를 데 없다.
저녁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가져 간 인스턴트 커피를 들고 모닥불로 갔다. 통나무들이 화력 좋게 타오르며 고산의 추위를 달래주고 있다. 인스턴트 커피를 군인들이 쓰는 반합에 넣고 끓인 물을 부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한 잔씩 돌렸다. 금방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good, good’ 을 연발하며 한 모금이라도 더 마셔보려고 반합 쟁탈 신경전이 치열했다.
“커피 다 가져와 봐” 커피 봉지를 몽땅 뜯어 반합에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즉석 반합 인스턴트 커피였다. “밤새 마셔도 돼, 잠도 쫓고 추위도 쫓고, 한국에서 가져 온 선물이야”
목석처럼 뻣뻣하게 굴던 소대장이 커피 한 모금에 슬슬 입을 열었다. 내일은 우리를 위해 더 가이드를 잘 하겠다고 다짐까지 한다. 동행한 소대원들이 스무명이며 나머지는 간이 텐트를 치고 사주경계를 하고 있노라며 보안(?) 누설까지 한다. 군대 회식에서 막걸리에 취기가 얼근하면 군생활의 고단함도 다 잊고 흥에 겹듯이 우리들도 인스턴트 커피에 취해 하나가 되어갔다. 추운 암흑 속에서 서로의 몸 속에 같은 커피물이 흐르는 하나의 동지가 되었다.
적도의 고봉 4,507m의 숨가쁜 산행 동안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마음을 여는데 는 12g의 작은 커피봉지 하나면 충분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하라. 그러면 바뀐다” 작은 커피 봉지가 증명해 준 ‘중용23장’의 말이다. /권영동(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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