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트라우마
  • 박정혜(심상시치료센터장, 전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9.05.01 1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백=정윤성
/화백=정윤성

 

트라우마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생각해보라. 오늘 하루는 어땠는가. 별일 없이 무난하게 하루를 보냈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이다. 진정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뉴스 방송은 보지 말 것,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보지 말 것, 그리고 신문에는 아예 눈도 돌리지 말 것. 그게 안 된다면, 우리의 일상은 별일이 없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별 볼 일 투성이다. 
최근 우리의 이목을 집중하게 하는 뉴스가 있다. 중학생인 의붓딸을 살해한 서른한 살의 계부와 범행을 공모했던 친모 사건이다. 의붓딸은 비명으로 횡사하기 전, 계부가 자신을 폭력하고 성추행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지난 9일 목포 경찰서에 성추행과 강간 미수로 계부를 신고한 바 있다. 그런 후 보복 살해가 일어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살해당했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친모이다. 미리 사다 놓은 노끈과 청테이프로 의붓딸을 묶은 뒤 목을 조르는 동안 친모는 두 살배기(생후 13개월) 아들을 안고 있었다. 자신이 낳은 딸이 평소에 농락당하고 잦은 폭행까지 당하다가 마침내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매몰차게 방관했던 어머니. 12살, 딸아이뿐만 아니다. 생후 13개월의 아들은 무기력하게 사건 현장을 목격한 셈이다. 태어난 지 불과 일 년 남짓한 어느 날에 뜻밖의 사건 현장에 내던져진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두 개의 기억 시스템을 갖고 있다. 내재적 기억(implicit memory)과 외현적 기억(explicit memory)이다. 내재적 기억은 무의식의 기억이며, 생후 바로 활성화된다. 정서적 기억, 신체 감각적 기억, 행동 기억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시간 개념이 없으며, 언제 어디서 경험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없다. 특별한 집중 없이 그냥 저절로 입력된 기억들이다. 그래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출력되어 나온다. 이 내재적 기억은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논리적인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일생을 통해 지속된다. 살아가면서 행하는 어떤 행동이나 감정, 신념이나 가치관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태어나서 세 살 정도까지는 해마가 완전히 발달 되지않았기 때문에 이때의 기억은 우측 뇌의 편도체라는 곳에 있다. 언어 발달이 이뤄지기 전인 이 시기 동안은 내재적 기억의 형태로 저장되어 남게 되고, 외현적 기억으로는 저장되지 않는다. 두 살 아이가 불현듯 가지게 될 기억도 바로 내재적 기억인 것이다.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Tomas Transtromer)는 ‘기억이 나를 본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녹음이 /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 새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부디, 애꿎은 그 아이가 기억의 숨소리로부터 새로울 수 있기를. 모든 상황 속에서 따라오는 기억을 쳐내어 멀리 보내기를. 스위스 신학자 카를 바르트(Carl Bard)가 했던 말,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를 염두에 두는 삶이 되기를, 부디 무의식적으로 침투했을 트라우마를 무사히 잠재울 수 있기를. /박정혜(심상시치료센터장, 전주대 겸임교수) 

많이 본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