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정읍 선비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정읍 선비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 글=이종근, 사진=오세림 기자
  • 승인 2019.07.0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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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이만난사람-한국의 서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선봉장에 선 무성서원 이 치 백 원장

세계유산위원회는 6일 오후(현지시간)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회의에서 정읍 무성서원(사적 제166호) 등 서원 9곳을 묶은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의'을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 유산 14개소를 보유한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한국의 서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앞장 선 이치백 정읍 무성서원 원장을 만나보았다./편집자 주

 

이 치 백  원장
이 치 백 원장

 

△우선 소감이 어떤가.

 서원이 조선시대 교육 및 사회적 활동에서 지속적이고 널리 전국적으로 전파돼왔던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는 점이 인정을 받아 기쁘다. ‘한국의 서원’은 지난 2011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이후 2015년 1월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반려’ 의견에 따라, 2016년 4월 신청을 자진 철회한 바 있다. 이후 국내외 전문가의 의견을 거치고 비교 연구를 보완한 끝에 9개 서원이 갖는 연속 유산으로서의 논리를 강화했다. ‘한국의 서원’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 총 9개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등재 결정과 함께 등재 이후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존 관리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등재까지 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 등재된 서원 9곳은 우여곡절 속에 그나마 제모습을 지키고 있는 곳들로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유네스코는 등재와 함께 해당 서원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과제도 내줬다. 무성서원은 한때 전라감사가 원장, 태인현감이 원이를 맡은 적이 있었다. 2000년대 진외가 아저씨뻘이 되는 김환재씨로 인해 졸지에 재장을 맡았다. 그래서 2005년부터 무성서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후 2011년 10월 25일 무성서원 모현회(慕賢會)가 발족, 서원에 모신 최치원 등 7명 선현들의 유덕을 숭모하며 이를 후손들에게 계승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앞서 같은해 4월 18일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등재추진단(단장 이배용)이 발족됐다. 모든 업무는 문화재청과 추진단이 관장했다. 2012년 3월 9일 국가브랜위원회와 정읍시청이 무성서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업무 협약를 체결했다. 2103년 3월 18일 한국의 서원 협의회를 창립, 이치백원장이 회장을, 서승원(소수서원)과 정경무(남계서원)씨가 부회장을 맡았다. 서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베트남에도 있다. 한국의 서원이 유교문화의 발상지인 중국의 서원보다 먼저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점은 의미가 적지 않다. 한때 철폐령이 내려졌던 서원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세계유산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됐다.

△한국의 서원이 어떤 면에서 쟁쟁력을 갖추었는가.

무성서원 등은 2009년 이전에 모두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조선 후기에 훼철되지 않아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의 서원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 4가지에 충족했다. 첫째, 조선시대 대표 사립교육 시설로 성리학을 조선사회에 정착·형성한 산실로 중국의 성리학이 서원에서 중국, 일본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 점, 둘째, 성리학이 지향하는 자연관과 한국의 문화적 전통이 반영된 교육 유산의 특출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건축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보여 주는 탁월한 사례, 넷째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사상과 활동의 보고, 유교의 예(禮)가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존속된 곳으로 지역사회의 정신문화적 유서가 서려있는 현장이라는 점 등이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동아시아에서 성리학이 가장 발달한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각 지역에서 활성화된 서원들이 성리학의 사회적 전파를 이끌었다는 점과 서원의 건축이 높은 정형성을 갖췄다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에 필요한 ‘탁월한 보편적 기준’으로 제시됐다.

△정읍 무성서원을 자랑한다면.

 정읍 무성서원은 일제의 침략을 받을 때인 1906년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맹주로 추대하고, 돈헌 임병찬선생의 주동 아래 항일의병 거의의 횃불을 올렸던 곳이다. 전국의 서원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구국 의병을 창의 서원이된 까닭이다. 이를 역사에서는 병오(丙午)창의라고 한다. 이들은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했으리라. 또, 많은 서원들이 특권 계층으로의 진입을 위한 곳으로 활용됐지만 무성서원은 마을 유림들이 은퇴해 후진을 가르치는 장소였다. 향촌민에게 흥학(興學) 목적으로 세워진 서원이며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을 교화한 대표적 서원이다. 특히신분 계급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학문의 기회를 동등하게 제공하기도 했다. 무성서원 향사 인물에 주벽은 최치원, 배향은 정극인, 신잠,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의 지역 현인들을 배향했다. 이들 7명의 순서가 어떤 경우라도 뒤바뀌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기 바란다.

△왜 무성서원이라고 하나.

 정읍 무성서원은 신라후기의 학자 최치원과 조선 중종때 관리 신잠 등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교육 기능과 제사 기능을 모두 갖고 있다.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자리래 무성서원이라고 하며, 최치원과 신잠 등을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1696년에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이라 하게 됐다.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현가루, 동·서재, 명륜당 등이 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문루인 현가루(絃歌樓, 3칸 2층 건물)는 ‘논어’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공자가 무성에 가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 소리를 들었다<子之武城 聞絃假之聲>’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래서 현가루이고, 그래서 무성서원이 된 것이다. 현가루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천자문의 ‘현가주연 접배거상(絃歌酒讌 接杯擧觴: 현악기로 노래하고 술로 잔치하고 잔을 잡고 권함)’이란 문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거문고를 타서 노래하고 술로 잔치하고, 잔을 공손히 쥐고 두 손으로 들어 권한다’ 비파를 타며 노래 부르고 술을 마시는 잔치에서 술잔을 얌전하게 쥐고 두 손으로 들어 올려 권한다. 귀족들은 잔치할 때 당비파를 잡히고 이에 어울려 노래하면서 계속하여 술잔을 주고받았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노나라 무성(武城)의 현감이 되었던 바, 예악(禮樂)으로서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공자가 이 고을을 찾아가니 마침 현가지성(絃歌之聲)이 들려와 탄복했다는 일화와 연관되는 명칭이다. 다른 서원의 문루가 신유학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의미를 함축하는 내용인 것과 달리, 현가루는 원시 유학의 현실 참여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구한말 면암 최익현 주도하에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이곳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켜 격문을 열읍에 보내 호응을 촉구하는 무성서원 창의와 일제시대, 6.25를 거치면서 100년 이상의 세월을 지쳐온 까닭에 참으로 대견하다.

△다른 지역의 서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돼 있다는데.

 이번에 ‘무성서원(전북 정읍),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사적 제55호 영주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1542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1543년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했다.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됐다. 사적 제170호 안동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적 제260호 안동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유성룡은 도학·글씨·문장·덕행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에도 성곽 수축·화기제작을 비롯, 군비확충에 힘써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이었다. 1863년에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됐다. 사적 제154호 경주 옥산서원 은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됐다. 이곳은 1572년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사적 제488호 달성 도동서원은 1605년에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적 제499호 함양 남계서원은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해 1552년에 지었다. 1566년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됐다. 사적 제242호 장성 필암서원은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1590년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662년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사적 제383호 논산 돈암서원은 김장생(1548∼1631)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1634년에 건립한 서원이다. 1660년에 왕이 돈암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추가로 모셨다.

 


이치백 원장은 일선에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파노라마처럼 설파하는 그는 이 시대 최고 원로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평생 언론인임을 자부하는 이원장은 1929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 해성초, 이리공고, 원광대를 거쳤다. 도내 언론인 중 최초로 성곡언론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동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25세때 연합신문 기자로 출발, 동화통신, 중앙일보, 전북일보 등 언론사에서 기자, 부장, 편집국장, 주필 등을 두루 거쳤다. 서울분실장을 3년간 지내기도 한 그는 지역 언론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관훈클럽 감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감사, 종군기자 동경특파원, 전라일보 사장을 지냈다.
지역 향토문화 발전에도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동학혁명기념탑, 채만식 문학관, 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 전북애향장학재단 등을 설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33회 전북대상 대상의 영예에 오른 전북향토문화연구회는 지난 1973년 전북대학교 인문과학대학의 이강오·송준호·김준영 교수가 뜻을 모아 ‘향토문화는 민족문화의 뿌리, 향토사는 국사의 기초’라는 이념 아래 전북의 문화와 역사를 조사 연구하는 등 지역 문화 발전에 노력했다.
그는 1992년 한·일 국제학술대회를 개최와 2012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의 남원싸움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가지는 등 해방 전후 발자취를 재조명하는 데 힘썼다. 그는 17년 동안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았다. 최근엔 최병운씨가 그 뒤를 이어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원광대학교와 우석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지역사회와 지방언론' 등 저서를 펴낸 바 있으며, 전북도 문화상 등을 받았다.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이태조어진전주환안추진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관훈클럽 종신 회원, 한국향토사연구회 전국연합회 명예 회장, 충경사 원장, 무성서원 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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