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열(忠孝烈)의 상징, 정려(旌閭)를 어떻게 할 것인가
충효열(忠孝烈)의 상징, 정려(旌閭)를 어떻게 할 것인가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7.1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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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자랑이자 마을의 자랑이던 정려각은
현재 관심과 의식에 따라 보호 또는 방치되기도”
김 철 배-임실군청 학예사
김 철 배-임실군청 학예사

얼마 전에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효자비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문의가 왔다. 대부분의 효자비와 열녀비 등은 동네 어귀에 세워 지나가는 사람의 모범으로 삼았는데, 동네가 자꾸 확장되다 보니 마을 어귀가 아닌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하게 된 것이다. 주민의 말을 빌리면 후손도 남아 있지 않고 정려각은 낡아서 보기 흉하니 관청에서 한 군데로 모아 관리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충효열(忠孝烈)을 미덕으로 마을을 대표하던 가문의 사람들이 오래 전에 떠났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고령화로 접어들면서 청소하기도 벅찬 사정이 돼버린 것이다.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실천한 정표로 세워졌던 정려(旌閭)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많이 건립되었다. 국가이념을 일상에서 충과 효로 실천한 사람들을 기리는 것은 국가의 권위와 체제의 안정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세종대왕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 보급하여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이념의 핵심 충효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조선후기에 이르면 향촌사회의 소위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명성을 정립하는데 주효한 방법이 되었다.

포장을 받으려면 대상자의 행적을 인근 지역의 향교나 서원에 통문(通文)을 보내 알려 동의를 요청하면, 이에 대해 답통(答通)으로 회신한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수령에게 알리고, 수령은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다시 관찰사는 조정의 예조에 계문(戒文)을 올리게 된다. 조정의 논의 후에 임금은 비로소 ‘명정(命旌)’을 내렸다. 이처럼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때문에 명정을 내리는 예조입안(禮曹立案) 문서와 통문류를 소장하고 있는 후손들이 더러 있지만 이 사이에서 발생한 모든 서류를 갖추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필자는 지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가문들을 찾아 그 자료들을 조사하고 있다. 이러한 문서들을 통해서 해당 성씨의 입향조(入鄕祖)로부터 시작된 사회적 지위와 성장과정, 지역의 네트워크의 모습을 통해서 향촌사회의 한 단면을 살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집이나 일기류, 각종 고문서를 통해서 국가와 사회의 기초단위 마을의 역사를 재생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효자, 열부, 그리고 충신을 기리는 정려 역시 마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그 관리와 보존은 개인에 맡겨져 있다. 임실에서 확인되는 정려는 12개면을 통틀어 106건이 있는데, 이 가운데 효자비는 55건, 열부비는 47건, 충신비는 4건이다. 106건 중에서 1910년 이전에 건립된 것은 33건, 일본강점기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건립된 것은 22건, 1945년 이후 건립된 것은 41건으로 전체 38%를 차지할 정도로 해방 이후 더 많이 건립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조선시대 조정에서 관장하였던 명정제도는 일본강점기에는 향교와 성균관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느슨해졌으며, 또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유교적 가치가 크게 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과 가치는 21세기 사람들의 그것과 교차와 대립하는 과정에 있으며, 아마도 새로운 가치 질서를 찾아 갈 것이다.
현재 임실에서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정려는 1건에 불과하다. 임실읍 정월리 김해김씨에서 배출한 아버지 김복규와 아들 김기종, 부자(父子) 효자를 기리는 <김복규ㆍ김기종 효자정려비 및 정판>이 그것인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김기종의 인연으로 김정희의 필체가 남아 있는 정려이다. <임실군 향토문화유산 보호조례>에 의해서 지정되어 관리되는 정려도 1건에 불과하다. 정려는 명정(命旌)을 받는 것도 어렵지만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도 쉽지 않다.
한 시대의 국가에서 공인한 가문의 자랑이자 마을의 자랑으로 여겼던 정려각은 현재에는 남아있는 후손과 마을 주민의 관심과 의식에 따라 보호되기도 하고 방치되기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삼강오륜(三剛五倫)의 실천을 중시하였던 시대의 역사적 유적으로 정려를 국가와 지자체가 나서서 관리해야 할 지 결정해야 할 때가 조만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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