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첩 명인 변경환(전북문화재 제62호 전주 배첩장)씨가 화사한 빛을 작품 가득 불어넣는다. ‘배첩(褙貼)’이란 글씨나 그림에 종이와 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장정, 고서화 등의 아름다움은 물론 실용성 및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법을 가리키며, 오늘날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표구(表具)’라는 말이 보편화되어 있다.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배(褙)는 등(背)에 옷(?)을 입힌다(貼)는 의미이다. 변씨는 전북 유일의 이 부문 문화재보유자로, 전국엔 단 두 사람만이 문화재로 지정됐을 뿐이다./편집자주

그는 풀을 먹여 붙이고 두드리는 등 꼼꼼하고 정교한 손길로 훼손된 예술품을 되살려내는 그는 세월의 더께를 말끔이 씻어낸 채 ‘전통문화’를 50여년 동안 올곧게 배첩 기술을 이어오고 장인이다. 아니, 이끼 낀 섬돌에도 꽃을 피우게 하고, 오래된 고목에도 잎에 싹을 틔우게 하는 마법사같은 존재이리라.

사무실에 들어서자 화려한 색깔로 수 놓아진 10폭짜리 ‘백수복(百壽福)’ 병풍이 시선을 붙들었다.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자랑하듯 “수(壽)자와 복(福)자가 각기 다른 형태로 100개 이상이 들어있다”고 했다.

시나브로,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생명을 다한 듯, 바삭바삭하게 갈라져 팡이내음 퀴퀴한 백수복병풍이 마법에 걸린 듯 본래 모습을 되찾고 있다.

화조병풍을 두르면 ‘나’는 사랑하는 신랑이 되고 신부가 되고, 문방구 병풍을 두르면 선비가 된다. 그리고 산수 병풍을 두르면 유유자적하는 은둔거사로 변한다.

“서화 배첩의 생명은 원본을 최대한 살리고 보존하는 것이에요. 오래되어 낙엽처럼 바스러지던 문화재도 제때 보수하면 몇백년 이상을 더 보존할 수 있죠. 천 년을 간다는 전주 한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또 얼마나 강한지 몰라요. 고서화를 되살릴 때 한 장 한 장 물로 세척하여 손상된 부분이 떨어져 나가도록 하는데 그렇게 해도 한지는 멀쩡하게 살아납니다. 종이의 때가 빠져서 흰 빛이 살아나고 먹빛이 선명해지지요. 아마도 세척해도 되는 종이는 우리 한지밖에 없을 거요!”

전주는 예로부터 전라감영이 자리한 까닭에 한국 배첩의 산실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배첩(褙貼)은 글씨나 그림에 종이나 비단 등을 붙여 아름다움과 수명을 더하는 전통적인 서화 처리 기법을 가리킨다. '표구(表具)'는 일본식 표현이고 중국에서는 '장황(粧潢)'이다. 이는 글씨나 그림에 종이, 비단 등을 붙여 액자, 병풍, 족자, 장정, 고서화 등으로 처리하는 전통 공예기술을 말하며, 지금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모두 장황으로 부른다.

‘영정 후면 배접시 교농에 들어가는 물종과 수량’으로 밀가루 1말, 백반 5냥, 대왕풀가루 2냥 5전, 황밀 5홉, 후추 7냥 5전, 꿀 5홉, 비상 2냥 5점, 부용향 4냥, 소뇌 1냥, 조피나무 열매 2되, 용뇌 4전, 사향 1전 5푼, 흰 모시베 6자, 흰 명주 6자, 삼베 6자, 후유지 2장, 솜 2근, 가는 노끈 30파’로 나온다.

‘경기전의’의 기록을 통해 15세기(전주 경기전은 1442년 건립)에 이미 전주에 배첩장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본향이므로 이태조의 영정(국내 유일 국보 영정)이 자리하고 있는 만큼 배첩과 장황의 역사 또한 장구하다. 이외에 배접 널빤지로 쓰일 물종과 수량, 아교 널빤지로 쓰일 물종과 수량, 배접할 때 쓸 물종과 수량 등도 기록, 전주엔 배첩 장인들이 살아있었음을 나타내지만 구체적인 이름은 찾을 수 없다.

1872년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색이 흐려져 비장 장황이 낡아 새롭게 이모하는 그 기록이 ‘어진이모도감의궤(1872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이 남아있지 않나. 이는 앞면의 휘장은 남색과 흰색 무늬 비단으로 했고, 배접은 흰색 명주로 했다.

1806년에 탁본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산대첩비가 1백99년만에 전주역사박물관에 모습을 드러내게 한 것 역시 그의 손끝 예술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황산대첩비 탁본은 종이의 질로 보아 2백 여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다가 비문 좌측에 ‘만력(萬曆) 5년 정축(丁丑) 팔월’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확인, 선조 10년(1577년)에 처음으로 세워진 연대와 일치, 원본을 탁본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더욱이 황산대첩비의 걸고리의 뒷면에 ‘황산대첩지비(荒山大捷之碑) 1806년’이란 표식을 확인, 이같은 가능성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었다.

변씨는 “종이 재질로 보아 2백년 안팎의 것으로 추정되는데다가 비문의 걸고리의 뒷면에 ‘황산대첩지비 1806년’이란 글씨를 확인하게 됐다”며 “족히 문화재급은 되고도 남을 것이라고 판단, 원 상태로 복원하는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이 작업에 임했다”고 했다.

변경환씨가 걸어온 길

변씨는 장수군 산서면 출신으로 1964년 다가산방(현 전주 서울소바 부근)의 서재일씨가 서울 견지동으로 옮겨 일을 할 때 표구에 입문, 서울 백합표구사, 세종표구사 등으로부터 꼼꼼하게 일을 배우는 등 올해로 배첩을 접한지 5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는 한국금석문대계, 채용신의 영정, 황산대첩비, 황희정승 영정 등 문화재와 김제 청운사의 5백나한도, 그리고 전주시 강암서예관의 김홍조 화조도, 한석봉의 글씨 등 전체를 배첩하기도 했다. 제3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엔 천인천자문을, 제4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엔 백납병을 각각 제작, 전통의 향을 널리 발산하기도 했다.

그는 충남대 누리사업단에서 R&D사업 ‘한지 & 천연염색’에 연구원으로 참여해 의미있는 결과물을 냈으며, 한, 중, 일 장황연구회의 회원으로 2회(한국, 중국)에 걸쳐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도 성실한 모습으로 활동했으며, 2018년 전북문화재 제62호 전주 배첩장이 됐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문화연수원이 제1회로 마련한 ‘문화재 수리,복원 전문인 양성 과정’의 수료식에서 2년 동안의 과정을 마치기도 한 그는 오늘도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생명을 다한 듯한 그림이, 바삭바삭하게 갈라져 팡이내음 퀴퀴한 병풍이 마법에 걸린 듯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하고 있다.

한국문화재보존학회 회원이기도한 변씨는 “8백여 채 한옥의 기와 지붕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는 전주의 풍경을 생각하면서 전통의 혼을 올곧게, 굿굿하게 지키고 싶다”며 “이제는 전북을 뛰어 넘어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숭례문, 운현궁, 풍남문 등 각 건물에서 나온 기와들을 탑본해 병풍으로 만들어 전시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오늘도 종이 위에 시간을 가두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