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장수가야 긴잠을 깨우다
후백제, 장수가야 긴잠을 깨우다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11.2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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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침령산성, 장수가야 초축, 후백제 증개축
우리나라 최대 규모 집수정, 도르레 처음 출토"
곽 장 근-군산대 교수 가야문화연구소소장
곽 장 근-군산대 교수 가야문화연구소소장

1,500년 전 백두대간 ICT왕국 장수가야의 정치 중심지가 장수군 장계분지이다. 전북 동부지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100여 개소 봉수의 최종 종착지이다. 장계분지 동남쪽에 우뚝 솟은 백화산에서 서북쪽으로 갈라진 여러 갈래의 산자락 정상부에 120여 기의 가야 고총이 무리지어 있다. 봉수왕국 장수가야의 왕과 왕비, 왕족들이 잠든 지하궁전이다.
장수 침령산성은 장계분지 서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에 위치한다. 후백제 동쪽 방어체계의 국가 전략이 담긴 포곡식 산성으로 두 개의 골짜기를 아우른다. 금남호남정맥 장안산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장계분지와 장수분지를 갈라놓는 산줄기 끝자락이다. 백두대간 육십령을 넘던 옛길이 장계분지를 가로질러 침령산성 북쪽 방아다리재를 넘어 전주까지 이어진다.

장수군 내 고대 산성 중 최대 규모로 남쪽과 북쪽, 동쪽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성벽이 대부분 무너져 내렸다. 산성의 동벽과 남벽은 세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로 줄쌓기 방식으로 쌓았고, 북벽은 다듬지 않은 깬돌을 가지고 허튼층쌓기로 축조했다. 성벽의 축조기법이 그 위치에 따라 큰 차이를 나타낸 것은 여러 차례 증개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주관으로 3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집수정의 구조가 파악됐다. 산성 내 산봉우리 동쪽 정상부 평탄대지에서 계단식 집수정과 남쪽 기슭에서 2개소의 집수시설이 더 발견됐다. 계단식 집수정은 그 평면 형태가 원형이며, 직경 16m로 흙을 파낸 뒤 직경 12m, 깊이 4m로 호남지방에서 학계에 보고된 집수정 중 최대 규모이다.
집수정은 흙을 파낸 뒤 벽석 사이에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1.5m 두께로 점토를 가지고 견고하게 다진 뒤 세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석재를 계단식으로 쌓았다. 936년 후백제 멸망으로 산성이 폐성되는 과정에 상단부 벽석을 인위적으로 무너뜨려 폐기했다. 산성 내 대형 건물지도 화재로 무너져 기와편이 붉게 산화된 상태로 볼록하게 쌓여있었다.
유물은 집수정 내부에서 10세기를 전후한 토기편과 초기청자편, 기와편, 철기류, 목기류 등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당시 장수지역의 발전상과 사회상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값진 유물들로 후백제 박물관을 떠 올리게 한다. 원형 수막새는 중앙에 돌대로 자방을 마련하고 그 안에 문양이 없는 것과 8엽 연화문이 표현되어 다른 유적에서 나온 예는 이질적인 기종이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 즉 금강 최상류 장수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장수가야에 의해 초축됐을 개연성도 점쳐진다. 산성 내 지표에서 밀집파상문이 시문된 회청색 경질토기편, 유두형 개배편 등 가야토기편이 일부 수습되어, 장수가야에 의해 초축된 뒤 백제를 거쳐 후백제 때 현재와 같은 규모로 증개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 침령산성은 처음 산정식에서 후대 포곡식으로 바뀐다. 테뫼식 성벽은 산봉우리 거의 정상부를 한 바퀴 둘렀는데, 북쪽과 서쪽 성벽이 여기에 해당된다. 성돌은 그 두께가 일정하지 않게 판자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동쪽과 남쪽 기슭에서 테뫼식 산성의 성벽 기저부가 드러났는데, 성돌은 그 크기와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이다. 아직은 테뫼식 산성의 초축 시기를 단정할 수 없지만 유물상로는 가야토기편이 가장 앞선다.
그러다가 후백제 때 포곡식으로 증개축된다. 본래 테뫼식 산성이 자리한 산봉우리 정상부에서 동남쪽과 남쪽으로 갈라진 두 갈래의 산자락을 포곡식 산성의 성벽이 아우른다. 후백제 때 증개축이 이루어진 동쪽과 남쪽 성벽은 세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로 줄 쌓기와 품자형 쌓기 방식을 적용하여 쌓았다. 신라 산성과 성벽이 흡사하여 신라 사람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장수가야에 의해 처음 축성된 뒤 후백제가 외곽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 현재의 모습으로 증개축된 것이 아닌가 싶다. 장수가야 산성보다 3배 이상으로 그 규모가 더 커졌다. 백두대간 육십령이 후백제의 동쪽 관문으로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고, 초기철기시대부터 후백제까지 철산개발로 후백제가 장수군 일대를 얼마나 중시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장수 침령산성은 장수가야가 테뫼식으로 처음 터를 닦고 백제를 거쳐 후백제 때 포곡식으로 증개축됐다. 장수가야가 처음 터를 닦고 쌓았던 산성을 400년 뒤 후백제가 긴잠을 깨우고 3배 크기로 다시 쌓았다. 2019년 9월 2일 국가 사적 제551호로 지정된 진안 도통리 1호 벽돌가마에서 구운 것과 똑 같은 초기청자편이 산성 내 집수정에서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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