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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925년,공기골 양서방의 부성 남밖장보기(기사보류)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3.02.16 17:56
【기획 3면】1925년 2월, 해장부터 서둔 덕에 늦지 않게 싸전다리에 당도했다. 상관 공기골에 사는 양점돌의 등에는 싸리나무로 만든 빗자루가 들려 있다. 남밖장(남부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짬짬이 엮어 둔 것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참 전부터 그의 뒤를 따라 오는 이 때문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직 해동하려면 더 있어야 할텐데 으슬으슬하게 헐거운 옷차림으로 나뭇짐을 메고 자신의 뒤를 곧이 곧대로 따라오는 이였다. 식자가 좀 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주 상민은 아닌데 풍신은 영락없이 땔나무장수다. 아마도 장길이 낮선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점돌은 등짐도 가볍것다 장을 한 바퀴 휘돌아볼 요량으로 남문통에 들어선다. 작년 그러께 놓은 이 다리(전주교)는 돌도 강회도 아닌 것이 어찌나 실한지 언제 봐도 믿음직스럽다. ‘공구리(콘크리트)라고 허든디 당최 뭔소린지 므르겄당게’ 혼자 뇌이며 남문통에 들어선다. 전주교에서 풍남문에 이르는 남문통은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요 몇년 사이 남밖장은 몰라보게 융성해졌다. 전주에는 원래 동서남북 사방 모두 장이 있었다. 서쪽은 선밖장, 동쪽은 동밖장, 북쪽은 북문장이다. 서문 밖에 있던 선밖장은 동학군이 용용하게도 장꾼으로 변신하고 들어선 유명한 곳인데 1923년 남밖장에 병합되었다.전주 인구라야 2만 정도, 신식 교통수단은 경편철도(輕便鐵道)와 도장관(道長官) 전용차 한 대가 고작이다.양점돌은 오늘 꼭 빗자루를 팔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갈자리 따위로 허술하게 지붕을 엮은 공터에 장이 들어섰다 하면 갖은 물건에 하얀 조선옷 입은 인파가 몰려 그 속에 끼이면 자기도 모르게 웬지 흥에 겹고 살판나는 것인데 마누라는 이런 그를 두고 "장에 인이 백였는개벼"하며 나무라곤 한다. 원래 2일과 7일에 5일장이 섰는데 옹기점이나 대장간이 들어서면서 어느새 상설시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남문통에서 매곡교 사이가 소란 스럽다. 후다닥 달려가보니 중국사람이 이끄는 곡예단이다. 원숭이와 뱀이 재롱을 떨고 송판 앞에 사람을 세워놓고 칼을 날리기도 하는데 아낙네들은 이 대목서 꼭 눈을 질끈 감는다. 이쯤해서 어린 계집아이가 목을 뒤로 젖혀 다리를 걸고 돈그릇을 돌리면 저마다 한두푼씩 구경값을 던진다. "저 몸 휘어지는 것 조매 봐, 초를 먹여서 그런디야" 하고 여자들이 수군거리며 혀을 끌끌찬다. 싸리비 다 팔때까지 쪼그리고 있었더니 발도 저리고 허기가 몰려와 장마당의 비빔밥집을 찾아 들어선다. 치마 길이만큼이나 긴 앞치마를 두른 주모가 넓다란 바재기를 손에 받쳐들고 숟가락 두 개로 밥을 비벼대다가 말미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려 내 놓는 비빔밥은 이 남밖장의 별미다. 남문통에서 매곡교까지는 전이 즐비하다. 소금 파는 염전, 쌀 파는 미전, 송방, 건재상, 종이전, 국밥집, 기름집, 유기전에 금은방 책방까지 말 그대로 없는 것만 빼고 다 있다. 다가동에서 완산동에 이르는 길에는 해마다 11월부터 12월까지 두달간 약령시가 섰다. 이즘에는 면포나 명주가 비단 공단에 밀리고 기계로 짜냈다는 옥양목과 인조견까지 나온다. 갓이나 망건, 담배통전은 그런대로 유지가 됐고 백로지 따위의 양지가 나오면서 금싸라기 같던 한지는 위세가 떨어지고 있다. 아직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생선을 생물로 취급하는 것은 꿈도 못꾸는 일이다. 마누라가 신신당부한 간고등어 두 마리를 사 새끼줄에 엮어 들고 매곡교 아래로 향했다. 백사장에서는 우시장이 열리고 천변에서는 갈자리나 바작, 삼태기, 갈퀴, 저릅대 등 농가에서 필요한 물건을 내다 팔았고 땔나무는 싸전다리나 매곡교 일대에서 거래했다. 매곡교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아니, 이 작자가 웬 싸대기여!" 한 사내가 볼을 움켜쥐고 막 대거리를 하는데, "야이 불상놈아, 네놈 눈구녁에는 이것도 안뵈냐, 어따대고 막말이냐, 이 놈아!"하며 때린 사내가 오히려 눈을 부라린다. 양점돌은 그 남자가 낮이 익다 싶어 자세히 보니 아침 나절 부터 자기 뒤를 졸졸 따라 오던 나무장수다. 그는 지게 꼭지에 달려 있던 갓을 가리키며 어디 상놈이 양반한데 하대냐고 호령을 치는 중이었다. 노는 꼴이 아니꼽지만 양반이라니 할 수 없다는 듯 맞은 사내는 물러선다. 나무를 팔고 다시 갓을 쓰고 위엄 갖춰 돌아가는 양반나리를 양점돌은 씁씁한 기분으로 바라본다. 서문쪽으로 해가 기울고 서서히 장이 파하고 있다. 다시 짐을 싸맨 장돌뱅이들에 섞여 양점돌의 들뜬 하루에도 땅거미가 내린다. (참고:작촌 조병희- ’완산고을의 맥박’)/김선희기자 sunny@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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