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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운봉고원 제철유적과 철의 전쟁

운봉고원 제철유적 40여 개소, 달궁계곡 집중
교역망 사통팔달, 기문국·백제·신라 철의 전쟁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3월 15일 13시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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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제철유적을 으뜸 유적으로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철유적은 국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철은 첨단기술의 결정체이자 물물교환에서 최고의 교역품이다. 전북 동부지역에서 230여 개소의 제철유적을 찾은 것은 가야사 국정과제 큰 성과물이다. 향후 네 번에 걸쳐 전북 동부지역 제철유적의 역사성을 소개하려고 한다.

운봉고원에서 제철유적이 그 실체를 맨 처음 드러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2014년 군산대학교 고고학연구회가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1박 2일로 워크숍을 개최했다. 필자는 이른 아침 달궁계곡에서 황갈색 녹물을 우연히 보고 제철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해 가뭄이 너무 심해 철광석에서 뿜어낸 녹물이 달궁계곡 바위를 진한 황갈색으로 수놓았다.

군산대학교 주관 발굴 작업에 참여하는 아저씨의 증언도 큰 몫을 했다. 몇 년 전 지리산 달궁계곡으로 가족 물놀이를 다녀왔는데, 당시 달궁계곡에서 쇠똥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지리산 반야봉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달궁계곡으로 흘러드는 하점골 계곡에 쇠똥이 수북이 쌓여있다는 것이다. 철광석이 뿜어낸 녹물과 아저씨의 제보가 제철유적을 세상에 알리는 단초가 됐다.

군산대학교 고고학연구회 자체적으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10여 개소의 제철유적을 찾았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예산과 인력을 지원해 그 수가 20여 개소로 늘어났다. 그러다가 2017년 가야사 국정과제 일환으로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4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학계에 보고됐다. 전국에서 단일 지역 내 제철유적의 밀집도가 월등히 높은 곳이 운봉고원이 아닌가 싶다.

2015년 나선화 전 문화재청장은 경향신문 임아영 기자에게 직접 부탁해 운봉고원 제철유적을 국민들에게 소상히 알렸다. 너무 늦어 면목이 없지만 큰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문화재청에서 긴급 발굴비를 지원해 주어 운봉고원 제철유적이 긴 잠에서 깨어났다. 전라북도와 남원시도 예산을 넉넉히 편성해 제철유적의 운영시기와 운영주체를 밝히기 위한 뜻깊은 발굴도 시작됐다.

운봉고원 철기문화의 역동성을 가장 잘 대변해 준 곳이 아영면 봉대리 고분군이다. 백두대간 남쪽 기슭 하단부에 위치한 신라 무덤에서 가야·백제·신라토기가 함께 나왔다. 운봉고원이 삼국의 격전지였음을 유물로 증명했다. 무슨 이유로 삼국이 해발 500m 이상 되는 고원지대에 국력을 쏟았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시 철산지를 장악하려는 삼국의 국가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까지 운봉고원에서 학계에 보고된 지배자 무덤은 180여 기에 달한다. 마한의 지배자 무덤으로 알려진 말(몰)무덤과 가야 고총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직은 말(몰)무덤을 대상으로 한 차례의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가야 고총은 그 실체가 파악됐다. 가야 고총은 봉분을 만든 뒤 다시 파내어 매장시설을 마련했는데, 무덤을 만드는 방법은 마한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다.

자연스럽게 기원전 84년 지리산 달궁계곡을 피난처로 삼은 마한 왕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할 것 같다. 운봉고원에서 가야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기문국의 뿌리, 즉 정체성이 마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기문국은 철산개발로 융성하다가 봉수왕국 반파국과 백제의 3년 전쟁에서 백제가 승리함으로써 결국 백제에 복속됐다. 하지만 무덤을 만드는 마한의 전통은 기문국이 멸망할 때까지 고대로 계속됐다.

백제 무령왕은 운봉고원 철산지를 장악함으로써 백제를 중흥기로 이끌었고, 538년 성왕은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겼다. 그러다가 554년 옥천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운봉고원 철산지가 한순간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됐다. 기문국과 백제, 신라가 철산지 운봉고원에 국력을 쏟아 하나의 무덤에서 삼국의 유물이 공존한다. 당시 운봉고원을 장악한 나라가 패권을 쥐었다.

운봉고원 철의 전쟁이 이쯤에서 멈추지 않았다. 백제 무왕은 왕위에 오른 뒤 3년(602)만에 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라 아막성을 공격했지만 참패로 끝났다. 운봉고원 서북쪽 관문 치재 부근 성리산성을 아막성으로 비정하는데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 최대의 화약고로 불리는 아막성 전쟁은 20년 이상 계속됐는데, 백제가 승리하여 운봉고원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백제 무왕은 운봉고원 철산개발로 익산 왕궁유적, 미륵사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왕성하게 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운봉고원의 철산개발은 후백제까지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 실상사 3대 조사 편운화상이 잠든 부도탑에 후백제 연호 정개(正開)가 유일무이하게 전하는 것은 그 역사성을 뒷받침한다. 고려는 후백제 멸망 4년 뒤 남원경을 남원부로 바꾸고 운봉고원의 관할권을 남원부로 옮겼다. 1000년 동안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 운봉고원의 철산개발과 철의 전쟁이 마침내 멈췄다.

/곽 장 근(군산대 교수 가야문화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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