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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전북론11회] 전북특별자치도법은 자치 없는 관치, 제2새마을운동법이다

■자치경제의 철학

산에 등산가는 은퇴자가 아니라
마을공장과 농원에서 인생이모작을
후생들을 예비하는 삶을 살자
인생이모작이 저출산 대책이다


기사 작성:  박은희 - 2024년 02월 04일 14시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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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생전북론 그 동안의 소회

필자와 주요섭 필자가 연재해온 『신생전북론』이 이번 회로 11회에 이르렀다. 그간 글을 써왔던 주요섭 필자는 연재를 마쳤다. 그 동안의 노고에 고마움을 전한다.

1월 18일 전특자도가 출범했다. 필자는 올해 12월 27일 시행될 「전북특별자치도 설치 및 글로벌생명경제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이하 전특자도법)을 자세히 살펴 봤는데 “생명경제”와 “개발특례”가 도대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민주당판 제2전북근대화, 제2새마을 운동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때만 되면 전북의 지도급 인사들이“동학 정신”을 말하는데, 동학 정신에 따르면 전특자도법은 나올 수 없는 발상이다.

이 연재기사에서 ‘신생’은 ‘지역소멸’에 대응하여 제출된 말이지만, 주류 개발성장론과는 다른 입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에서 소멸과 신생은 대립항은 아니다. 하나의 사태가 임계점에 이르면 소멸하고 다른 것으로 변화 또는 변이할 뿐이다. 그런데 전특자도법은 주류의 자기동일성의 확장일 뿐이다. 이는 개발주체들의 주체성을 타자(개발성장과 다른 생각)에게 강요하는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철학에서는 이를 주체와 타자의 문제라고 한다.

이번 회에서는 전북인이 아닌 전북인이면서도 주류 개발성장론자들에게 타자가 되고 만 “타자他者”와 “자치”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물론 자치는 지방자치할 때의 그 자치가 아니다. 지금 지방자치는 국가하도급관치, 기업유치에 불과하다.







정읍시 칠보면 소재지의 현재 모습, 새마을운동의 흔적이 역력하다. 전특자도법은 제2의 관치새마을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특자도법이 소멸하는 칠보면 소재지를 신생시킬 수 있을까? 사진 - 필자







2. 타자-되기

"타자-되기"는 가능한가? 신을 대신하여 타자인 인간이 되기로 하고, 개벽세상을 추구한 예수가 "타자 되기"의 첫 역사적 인물로 떠 오른다. "타자-되기"란 동학의 내 마음이 네 마음이라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다. 타자–되기는 내 자아 동일성의 확대, 주체의 강요가 아니라 차이로서의 타자를 존중하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어찌 가난, 전쟁, 불평등, 자연 파괴가 있겠는가? 개발성장 체제는 개발성장과 다른 생각들을 배제의 타자로 내몬다.



철학에는 존재론이란 것이 있다. 철학을 몰라도 근대인들은 철학이 부여해 온 존재론의 현실구현체 속에서 살고 있다. 주체의 본질을 찾고, 그 대리인을 찾고 권능을 부여해온 것이 교회, 국가, 화폐의 역사일 것이다. 수많은 사상이 말하는 존재의 본질이 인仁, 도道, 리理, 성性이라면 이 본질로부터 먼 자들은 타자로서 배제되는 운명에 처한다. 나는 이것을 "존재의 괴뢰성"이라 부른다. 개발해서 잘 먹고 잘 살자가 지금 시대의 인仁, 도道, 리理, 성性이다.



이것이 존재의 본질이고 이를 따르라는 것은 타자의 신자화 - 즉 도구화인 것이다. 교회(노파심에서 교회는 불당, 천도교당, 동학당, 무당...모든 종교를 포함)의 신자, 정당의 당원, 국가의 국민은 전혀 다르지 않다. 교회가 아니라 예수의 타자-되기를 본받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예수가 피 흘려 사랑한 타자 -되기의 그 타자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가 존재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가 사랑한 타자가 곧 존재(서구 철학에서 존재는 흔히 신, 존재자는 신 이외)의 존재자로의 현전(생생하게 드러남)이다. 물론 이런 사유는 동학의 핵심사유기도 하다.



서구 실체론적 존재론에서 존재의 본질 이외는 도구화된다. 자본시대에 돈 많이 버는 게 존재의 본질이다. 아니라고? 돈 많이 벌기를 포기한 것일 뿐이다. 학생은 선생의 도구다. 그렇지 않은 교사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드물다. 근대체제에 필요한 훌륭한 도구를 양산하는 것이 "민주시민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실체론적 존재론에 침몰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중-되기 또한 권력적 사유의 혐의가 짙다. 내가 타자가 되지도 못하고, 그 타자가 누구인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데 이념적으로 "민중"을 만들고, 민중의 편에서 민중을 위해 깃발을 들자고 한다. 필자는 민중을 버린 지 10여 년도 넘었다. 내가 민중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민중 대신에 ‘생명’ 또는 “산 - 목숨의 줄인 말 "산숨"을 쓴다. 내 산숨은 다른 산숨과 늘마다 마주친다.



주체는 늘 타자를 마주쳐서 자신의 동일성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타자와 더불어 변혁한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는 곧 나고 나는 곧 타자다. 필자는 그것이 민주라고 생각한다. 4년에 한 번 대리정치인을 뽑는 것이 민주가 아니다. 대의제는 대의제일 뿐이지 자치가 아니다. 전특자도법에 주민주체라는 말은 눈 씻고 찾아도 없다. 선언적이기는 하겠지만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는 “주민참여의 확대”, “주민권리에 관한 특례”, “주민소환에 관한 특례” 조항 등이 있다. 전특자도법 107조에 “주민참여예산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제주특별자치도법에는 주민주체의 내용이 훨씬 미치지 못한다. 전특자도법에는 없는데 연구원들이 이를 모를 리 없고, 제안했어도 정치인들이 제외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질비오 게젤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감소하는 ‘감가화폐’를 오스트리아 뵈르글에서 실험해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1933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를 금지했다. 출처 - 인터넷





내게 산숨들은 그 자체로 신령하다. 민중이나 계급이 끼어들 틈이 없다. 산숨들을 억누르는 국가와 화폐의 질서가 근대인들의 본질이라면 사회에서 태어나 사회를 지배하는 국가를 다시 사회로 되돌리고, 돈이 돈을 버는 화폐가 단지 사용가치의 등가적 교환수단으로 기능하는 비축장화폐를 운영하면 된다. 그런 것이 가능한가? 이미 코로나 재난지원금으로 사용한 경험이 있지 않는가? 지역화폐는 한시유통화폐로 축장기능이 없다. 질비오 게젤(Silvio Gegell)이 오스트리아 뵈르글에서 실험해 대성공을 거두었던 감가화폐를 지역화폐로 사용하면 된다.



3. 관치경제 대신에 스스로 하는 자치경제를 하자

대규모 공장과 사무실에서 철수한 은퇴노동자들이 돌아올 후생들을 위해 마을로 귀환하여 전라북도 243개 읍면동에 우리 자신들의 농원과 마을 작업장을 세우자. 거대 설비가 아니어도 과학 기술의 발달로 마을의 기본 생필품과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소농소공(小農小工)연합이 가능하다. 나는 이것을 도시와 대칭하여 농시(農市)라 부른다. 산에 등산가는 은퇴자가 아니라 마을공장과 마을농원에서 인생이모작을, 후생들을 예비하는 삶을 살자. 인생이모작이 저출산 대책이다.

미국의 로컬모터스는 500평 규모 공장에서 2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연간 전기 자동차를 2,000여대 생산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공단, 공공기관, 학교마다 소농소공연합체가 생산한 식량과 생필품을 교환하는 연합매장을 설치하자. 대자본 물류택배 회사 대신에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와 물류노동자가 연합해 세운 자치물류망을 만들자. 어린이 무상 병원을 만들고 마을마다 통합돌봄센터를 두자. 돌봄까지 진출하는 대기업 편의점의 무한발전에 대항하여 8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대동계’가 운영하던 구판장을 마을 공유로 부활하여 마을에서 생산한 물품과 식량으로 채우자. 기업형 축산이 아니라 동물복지를 적용해 소농이 연합형 자연형 목장을 두자. 대기업보험회사에 대항하여 마을공제기금 또는 노동연합공제기금을 만들고 운영하자. 이미 1920년대에 원산노련 선배들이 했던 일이다. 보령의 장고도에서는 수 천 년 마을이 자치관리해온 갯벌과 바다에서 나는 산물로 마을연금제를 실시하고 있다. 교원•행정공제기금은 있는데 노동과 마을은 왜 공제기금이 없는가? 신협과 새마을금고법을 고쳐 본래의 자치금융으로 되돌리자. 마을 자치방범대를 두어 대기업보안회사에 뺏기는 돈을 마을로 되찾아 오자.



이래야 전북특별자치도가 된다. 현행법은 자치 없는 관치개발법, 토건법, 자본법이다. 기업유치와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자치경제의 바탕에서 기업유치를 할 때 우리는 게약노예제의 타자가 아닌 타자-되기의 주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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