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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전북15회]개화세는 언제 개벽세로 갈 것인가?

동학혁명 130주년에 돌아보는 신생개벽

"무릇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배우고
행하는 것이 개벽의 출발이다
민주, 나아가 천지를 추구하는 것이 개벽이다
민심이 천심이고 민심이 있는 곳이 천지다"


기사 작성:  강주영 - 2024년 03월 10일 15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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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생개벽의 동학



정치의 계절이 오면 동학을 말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동학혁명이 누구의 독점물도 아니지만, 동학을 말하는 정치인들이 동학혁명 뿐 아니라 동학사상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학을 안다면 1894년 전라도 53군현에 설치된 민중의 자기통치기관인 '집강소'를 본받아 읍면동 주민자치를 시행해야 마땅하다. 현행 4년 대의국회제를 없애고 정당의 전국비례대표와 지역구는 읍면동 연합의 연합으로 그때그때 파견되는 국회의원이 선발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전국정당이 참여할 수 없다. 농사 문제는 농민이, 골목길 상권이 문제일 때는 동네 빵집 사장이, 알바 사안일 때는 알바생으로 지역구 의원은 그때그때 지역에서 파송되어야 한다. 지역구국회의원 전국동시선거는 없다. 이를 필자는 평의회제라 부른다. 필자는 1894년 동학혁명기에 집강소가 이를 이미 구현했다고 본다. 집강소는 조선의 암흑을 뚫고 솟아난 개벽 정치체였다. 개벽은 신비롭고 주술적인 게 아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몇 달이면 다 죽는다. 죽은 세포를 밀어내고 새 세포가 몸에서 늘 신생개벽하기에 우리 몸이 유지된다. 개벽은 일상생활에 늘 있다. 만인만물은 늘 뭔가를 한다. 나나 그대가 뭘 하던지 우리는 "~을 하는 님"이고, 늘 ~을 하기에 그대와 나는 '하늘-님'이다. 필자는 그게 동학이라 새기고 있다.



2. 개벽과 개화



유학의 향교와 서원이 동학의 '접'(接)으로 개벽했다. 사대부와 선비의 천하가 무지랭이 민중의 시천-주(侍天-主)로 개벽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베 짜는 아낙이, 코흘리개가, 천한 노비가 하늘이라니, 맞상에서 진지를 나누다니, 청상과부를 개가하라니, 부인을 공경하라니, 공감하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향교와 서원을 뛰어 넘었다. 접과 접이 '장소의 혼'으로 삼천리 곳곳으로 연결되었다. 천하대란의 시대였다. 하늘 아래 천하(天下) 가 아니고 천할 천(賤)하게 밑바닥에서 사는 천하(賤下)였다.



​동방의 공공재 천하, 사대와 사소로서 공존하던 천하체계가 아니었다. 성리학의 천하체계, 천자와 왕은 천명이고, 백성은 하늘 아래 왕 아래인 천하체계를 뒤흔드는 천하대란 시천-주 개벽을 개화당들이 일본의 대동아공영 개화로 바꿔치기 했다.



​개화당이 있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었다. 동을 접고 서에 홀렸다. 조급했다. 동도로 서기를 접하지 않았다. 무능하고 게으른 개화당들이 일본의 접을 만들었다. 천하체계의 사대와 사소로 청과 공존한(?) 조선처럼 일본과도 공존할 줄 알았다. 타파해야 할 천하체계에 개화의 옷을 입히고자 했다. 하니 무식하고 게으른 것이다. 오늘의 개화당은 미국의 접을 만들고 일본의 접을 지키고 있다.



​유학을 진화시키지 못한 정체된 유인들이 사리의 권력에 빠졌다. 위정척사였다. 위정이 조선을 사랑하고 약탈에 불과한 서학을 척사함이 그럴듯하나, 과연 고이면 썩으니, 동학을 위정하지 않고 척사했다.





박홍규 작 [대둔산의 아침] 동학혁명 최후의 전투로 알려진 대둔산 전투를 그렸다. 한지에 채색화, 박 화백의 허락을 얻어 게재



​3. 시천-주 인내천의 개벽세상



동학의 시천주란 천주를 모시는 시-천주가 아니라 하늘이 이미 내게 있는 님인 시천-주다. 시천주 인내천 상하와 남녀가 어찌 대등하지 않으리. 억조창생에 어찌 경계가 있으리오. 민족으로 나뉘고 민족으로 자결하고 자강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자연의 기운으로 자결, 자강하는 것이다. 생명의 바탕을 어지럽히는 반생명을 반하는 것이다. 권력에 탐닉한 모리배를 격퇴하려 한 것이다. 반외세 반봉건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부족하다. 드러난 형세만을 보는 것이다. 동학혁명은 세계를 민족으로서 근대국가로서 쪼개려 한 것이 아니다. 근대 민족국가의 자강과 자각의 투쟁이 아니다. 오래된 미래 지구일가의 투쟁이다. 동학인들은 민족인이기 전에 지구인이다. 시천주에 어찌 피부색과 말의 다름, 남녀노소가 작동하겠는가. 모두가 지구인 것을. 패도로서 지구를 교란하는 지구교란자에 대응한 것이다.



​일본 민족국가에 대응한 것이 저들과 같은 조선 민족국가였던 것인가. 포식자들의 헛세계화로 사멸해가는 민족국가라면 저 동학의 혼은 그 수명이 130년도 못된다는 것인가? 헛세계화에 대응하는 진세계화로 오늘의 동학을 다시 새겨야 하는 까닭이다. 서구의 논리는 패도의 헛세계로 자본의 십자군일 뿐이다. 민주 교조, 자유 교조, 사회 교조, 민족 교조에 맞서 다시 신동학을 호출하는 까닭이다.



4. 위자본척개벽



우리나라의 근대는 세계대란 춘추전국시대였다. 개화, 위정척사, 동학, 서학이 대립하고 공진하지 못했다. 오늘의 민주파와 성장파는 개벽을 척사하고 자본을 위정한다. 바름을 위하고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가 조선말 성리학을 중심에 둔 민중 탄압의 논리로 작동했다묜 오늘날의 위정척사는 위자본척개벽이다.



​서구로부터 이식된 근대 개화의 터전에서 개화파의 좌파는 사회주의와 민주파로 우파는 반공수구 자유주의로 분단되었다. 개벽파는 실종되었다 2개의 주권국가가 탄생하였으나 보국안민의 광복은 오지 않았다. 옛과 자금의 분단 속에서 민(民)이 하늘인 민주가 단독자 개인의 리(利)를 다투는 자유민주교조로 변질되고 있다.

천지는 너와 내것이 아닌 모두의 것인데 어찌 국가로서 경계를 다투며, 상하와 빈자와 부자로서 나뉘며, 자본독재와 인민독재에 시달리는 것인가. 하늘과 땅은 안과 밖이 없는데 사람이 자연을 수탈하고 자본과 시장이 사람을 수탈하는 것인가? 어찌 혁명의 법칙으로 민을 종속시켜 혁명의 속도전, 물질개벽만의 사회인민독재를 만든다는 것인가? 삶의 부침이 어찌 혁명의 과학으로 판단되는 것인가? 서학의 천주(天主)와, 동학의 시천-주(侍天-主)가 같은 것일진데 어찌 동과 서과 공명하고 공진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서학의 십자군교도들이 근대 백여 년을 전쟁과 침탈로 새겼을 따름이다.



욕망자 개인의 질서화인 민주교도들이 투표대의로 민주를 기만한다. 자유교도들이 천지와 나를 대동하는 시천주의 자유의지를 시장자유로 대체하여 역사의 종언을 노래한다. 당을 천명의 구현체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사회주의로 역사의 종언을 노래한다. 자유교도, 사회교도, 대의민주교도들에 대안은 없다. 또 다른 백년은 없다. 자유교도의 대한민국과 백두혈통 사회교도들이 통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고백해야 한다. 오로지 남은 것은 희미해지는 민족뿐이다. 서울과 평양이 기연, 불연, 불연기연하여 신생해야 한다. 평양이 삼성시가 되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서울이 평양이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어설픈 3지대도 아니다.





박홍규 작 [마을잔치] 마을과 지역이란 공유된 이야기(동구나무) 속에서 함께 일하고, 놀고, 먹는 누구에게나 열린 마당이어야 한다. 박 화백의 하락을 얻어 게재한다.



5. 신생개벽의 다른백년으로



이런 문제 의식으로 우리는 '다른 백년'을 생각한다. 전라도 정신, 슬픈 애상이 아닌 개벽이 좌절된 '개벽의 그리움'이 한이다. 천지공물과 그대가 나이고 하늘인 인내천, 전라도 장소의 혼으로서 '다시개벽'을 호출한다. 무릇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배우고 행하는 것이 개벽의 출발이다. 민주에 머물지 않고 천지를 추구하는 것이 개벽이다. 민심이 천심이고 민심이 있는 곳이 천지다. 그 민심의 천지실체를 찾고자 한다. 아직은 안개다. 하지만 서로 모여 놀고, 배우고, 행하면 다른 백년의 기획이 가능하며 통일의 실체도 분명해지리라.



하여 우리는 장소의 혼으로서 마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시장의 단위 시민도, 국가의 국민도, 자유교도도, 민주교도도, 사회교도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교도도 아니다. 다만 다름을 인정하되 다름의 교도가 아니고 '열린개벽'이고자 한다. 시민도 국민도 아닌 개벽마을 자치인이다. 자치인이되 천지를 품는 천지인이다. 마을과 마을을 연대한다. 연대된 마을들이 헛세계화가 아닌 진세계화의 천지마을들과 교류하고 협력한다. 불통의 동서고금을 소통의 동서고금으로 한다. 좌/우, 진보/보수의 진영을 벗어나 자각하고 자강하는 마을 천지를 품는다. 한 나라 안에서 이 마을과 저 마을은 다를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보수 마을이 있고 진보 마을이 있다. 원하는 그것이 그것이게 한다. 국가에 의해 표준화된 복사마을을 거절한다. 근대난세에서 다른 백년의 기획으로 경향각지에서 백가쟁명하기를 기대한다.



필자 주 : 몇 년 전 개벽신문에 쓴 글을 비판적으로 자기검토하여 반절 이상 들어내고 새롭게 썼음을 밝혀 둔다.

/강주영(건축시공기술사·목수·전 교육부 대표 시민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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