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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없는 용의 모습 새긴 머릿돌이 압권

[원지의 문(文)·화(畵) 스케치] <33> 예종대왕 태실과 비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4월 09일 14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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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胎)를 태항아리에 담아 석실에 묻었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태실은 조선시대 왕가에서 출산한 아기의 탯줄을 봉안한 시설이다. 왕자나 공주, 옹주 등의 탯줄이 담긴 아기태실과 왕이 된 아기의 탯줄을 담은 가봉태실로 분류된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태는 태아의 생명력으로 여겨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왕실에서는 전국의 명당에 태 항아리를 안치시켰다. 그 중에서도 성주의 세종대왕자태실은 규모나 가치면에서 으뜸이며 지금은 생명문화의 상징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전주 경기전에 조선 8대 임금인 예종(1450~ 1470, 재위 1468∼1469)의 태를 묻은 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원래는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 마을 뒷산에 있었다고 한다.

1928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의 태항아리를 서울로 가져가면서 태실들이 훼손되었는데, 예종의 태실도 이때 훼손됐다. 이후 태실은 구이초등학교 북쪽으로 옮겼다가, 1970년에 경기전으로 옮겨왔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이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웠으며,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돌로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으로,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 연대를 앞 뒷면에 각각 새겼다.

잘 보존된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리 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이 태실과 비는 왕실에서 태를 처리한 방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를 담았던 내항아리와 지석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내항아리를 담은 외항아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지석(誌石)'은 태 주인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기록하여 묻은 돌판을 말한다.

완주군 구리면 구암(九岩)은 이 마을 뒷산 아래에 있는 거북바위로 인해 과거에는 귀동(龜洞)골이라 불렸고, 조선시대 말까지 귀동마을에 면청(面廳)이 있었으며 귀동이 구이로 변천되면서 거북바위는 오늘날까지 면 상징물이 됐다.

구암마을은 수원김씨와 동래정씨, 연안이씨 등이 잇따라 이주하면서 마을촌이 형성됐다. 이 지역은 고덕산 줄기를 따라 약 500리를 뻗어 내려와 옆엔 아버지산인 경각산과 앞에는 어머니산인 모악산 등이 자리잡은 장엄한 대명당으로 분류되고 있다.

명당인 이곳엔 조선조 8대 임금인 예종대왕의 태를 묻었다는 태실(胎室)이 있었고 태실 아래에는 큰 웅덩이가 있었다. 이 웅덩이에 살던 큰 거북이가 알을 낳던 중 하나가 이곳에 떨어져 거북바위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궁궐과 도성의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제도 출발은 조선 8대 예종 1년(1469)이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의 즉위 초 궁궐호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서반 4품 이상 무관 중 병조의 추천을 받아 국왕이 낙점하는 순서에 따라 수문장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경국대전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지키는 군사가 약 70여 명이었다고 한다./글=이종근·그림=원지(XU WE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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