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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복숭아 꽃눈 내리는 날

김영숙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5월 28일 14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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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복숭아 나뭇가지 사이로 사월의 햇살이 분주하게 드나들며 골고루 볕을 뿌리고 다닌다. 이에 질세라 바람도 덩달아 햇살을 따라다니며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더니 하나둘씩 꽃망울을 터뜨린다. 농원마을 언덕 과수원에는 온통 분홍빛이 범람했다. 금방이라도 사선대에 분홍색 꽃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복사꽃은 갓 피어나면 연분홍색이다가 벌들이 분주하게 드나들며 수정을 도와주자 서서히 부끄러운 듯 진분홍색으로 변해 비로소 복숭아를 잉태할 진정한 복사꽃이 된다. 벌은 꿀을 얻고 꽃은 수정을 이루고 나는 ‘눈 호강’하고 가슴에 추억 한 줌을 복사꽃처럼 피우니 이보다 더 좋은 봄날이 있을까? 싶다. 꽃은 햇살 고루 받아먹고 한 시절 곱게 지내다가 꽃비 되어 떠난다. 꽃 진자리는 이파리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여름이면 태양 닮은 복숭아를 세상에 내놓는다. 사월 이맘때면 임실은 어디를 가나 복사꽃 천지다. 복숭아 고장답다.

복숭아를 생각하면 나는 늘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그리워진다. 시골집 앞마당에는 밑동 잘린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무는 그루터기에서 새순 내 자라더니 여전히 30년째 꽃을 피운다. 인적 끊긴 마당은 들풀들이 다 차지하고 담벼락은 바람이 반쯤 뜯어내고 제집 드나들듯 하는데, 그래도 한 해도 거르는 법 없이 봄이면 저 혼자 도원경(桃源境)을 꿈꾼다.

아들 동직이를 임신하고 나는 왜 그렇게 복숭아만 먹고 싶었는지. 복숭아 통조림도 먹어봤지만, 본디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오로지 싱싱한 복숭아만 먹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들은 입맛도 참 고급 졌다. 그랬으니 며느리 사랑이 각별하셨던 시아버지께서는 며느리를 위해 제철이 아니어서 복숭아를 구할 길 없으니 대신 복숭아보다 한두 달 먼저 익는 자두와 살구를 온 동네를 돌면서 얻어서 주곤 하셨다. 그러나 복숭아를 먹고 싶은 나의 입맛은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 달랑 몇 개밖에 안 달린 복숭아를 날마다 쳐다보며 입맛을 다셨고 손에 닿을 수조차 없는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복숭아는 내 시선을 피하며 더 태양을 닮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님은 톱을 가져오시더니 복숭아나무 가지를 아예 싹둑 잘라버리고 설익은 복숭아를 따 주셨다. 나는 딱딱하고 시금털털한 복숭아가 어찌나 맛있던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그날의 그 맛, 그 오묘한 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무야 또 심으면 되지만 먹고 싶은 거 못 먹으면 평생 한 되고 우리 손주 짝눈 된다.” 나무를 자르며 하시던 말씀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 생생해진다. 눈물겹도록 깊은 당신의 사랑은 복사꽃 화사하게 피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소환되어 다가선다. 복숭아나무는 잘린 상처를 딛고 새순이 돋더니 봄이면 시골 빈집 앞마당을 지키며 화사한 추억을 몽실몽실 피우며 해마다 추억이 매달린다. 함박눈처럼 복사꽃 꽃눈이 내리는 날, 4월의 뜰에 앉아 아련히 복숭아에 어린 상념을 살포시 내려놓으니 우물에서 숭늉 찾듯 벌써 혀끝에 달콤한 단물이 밀물처럼 일어 혀끝에 감돈다. 시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돋아 마음이 아리다.



김영숙 수필가는



2006년 '月刊 시사문단' 등단

수필집: '사소한 아줌마의 소소한 행복', '섬진강 들꽃처럼', 시집 '꽃에 안부를 묻다'

제22회(2018년) 임실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전북시인협회 회원 현 임실문협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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