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온누리] 남원 운림정사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9월 16일 14시38분

남원 대산면 운교리에 위치한 운교(雲橋)마을은 과거 산 위에 걸쳐진 구름이 다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붙어졌다. 오늘날 '운교리(雲橋里)'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을엔 수령이 350년이 넘는 느티나무는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유학자 포암산인(圃巖散人) 이종엽(1890~1968, 李鍾燁) 선생이 남긴 '포암산인 한시집(포암산인사고 상권)'엔 모두 130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다. 최근들어 '어찌하여 밤벌레 소리 이리도 시끄러운가(엮은이 이상찬, 펴낸 곳 도서출판 지운북스)로 한글 번역됐다. 이 책엔 '운림정사(雲林精舍)' 차운(次韻) 11수가 실렸다.

선생의 자(字)는 광섭(光燮)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종 갑신년(甲申, 1890) 정월 보름날, 구한말의 격변기에 국당 문효공 천(菊堂文孝公蒨)의 21세손으로, 부친 규상(圭祥)의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출세의 명리(名利)를 버리고 향리에 인재 양성에 뜻을 두어 '운림정사'를 설립, 이곳에서 다수의 동몽(童蒙) 지도서를 편찬, 지역 교육에 전념했으며, 수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포암산인은 사방의 산 중에서 풍악(楓岳)과 용성(龍城)보다 높은 산은 없으며, 마을은 운교보다 번화한 곳이 없다고 했다.

그는 운교(雲橋)의 '운(雲)'과 죽림(竹林)의 '림(林)'자를 취해 '운림정사(雲林精舍)'라 편액을 걸어 놓으니 간혹 시를 지어 찾아와서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정사(精舍)'란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수양을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사 주위엔 대나무 숲이 싱싱하게 푸르러 울타리를 칠 수 있었다. 외로운 소나무는 뜰 앞 중간에 우뚝 서 있고, 당전(堂前)에는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기르며 집뒤에는 구불구불한 연못을 만들어 손발을 씻을 수 있게 했다. 오늘따라 중국 송나라때 구양수(歐陽修 1007~1072)가 쓴 '취옹정기(醉翁亭記)'가 생각난다. '운림정사 차운'엔 대산면 대곡리 수당 최재, 순창 동계 관전리 청곤 양병화, 남원읍 죽항리 청포 이완묵, 왕치 내척리 죽포 소재택, 남원 보절 전기리 은림 소명섭, 동면 도장리 남강 박동우, 사매 대당리 소초 김양수, 대산면 갈곡리 송촌 장해준, 사매 송수리 오전 최병남, 평북 초산군 초산 박영래, 대강 수홍리 사형 죽포 오재호 등 11명이 참여했다.

'구름 다리 위에 운림정사를 짓고 십 년을 경영하며 선심(善心)을 기르네. 서쪽의 풍악산엔 단풍이 무르익고 동쪽의 용성에는 저문 구름 깊어라. 귀한 손님과 더불어 바둑과 술을 즐기고, 아이들은 시렁 가득한 서책을 읽네. 북창(北窓)에 한가히 누우니 세속의 번거로운 일 없고 때로 주역을 풀이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네(죽포 오재호)'

오재호는 포암산인의 사돈으로, 손자 이상찬 전북대 명예교수(화가)의 외조부이다. 그는 남강 박동우의 시에서 드러나 듯 '도연명처럼 팽택(彭澤)의 국화를 심었더니, 뜰 앞에 꽃과 잎이 그늘을 이루기'도 했다. '운림정사기(雲林精舍記)'에서 예견이라도 한 듯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흥폐와 성쇠는 끝없이 서로 이어지니 정사(精舍)가 다시 거친 풀밭으로 바뀔지 모른다. 하여 그대의 말은 찬사가 아니라 조소일지도 모르나...'

이 정사는 연지(蓮池), 죽림(竹林), 국화 화단, 서고, 곡소(曲沼), 양정당(養正堂), 육영당(育英堂), 그리고 포암산인(圃巖散人) 학예실 등이 있었던 것 같다. 이명예교수(화가)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운림정사가 지어진 시기는 1925년 경으로 추정하며, 1974년쯤 소실된 것 같다고 증언한다.

고택이나 고찰은 어떻게 지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건축가는 예나 지금이나 삶에 대한 철학을 집에 담는다. 성리학자들은 자신이 깨달은 우주의 이치를 집에 담았고, 꿈꾸는 이상을 그곳에서 영위하려 했다. 예나 지금이나 집을 바라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객관화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눈 앞에 내놓고 함께 공유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리라. 지금은 사라진 '남원 운림정사'를 다시 복원하면 안되는 일인가./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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