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전북의 창]전북, 다시 스스로를 존엄하게 세워야 한다

후백제의 정신에서 전북특별자치도의 길을 묻다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12월 18일 16시23분

전북은 오랜 시간 대한민국의 변방으로 인식되어 왔다. 산업화와 국가 성장의 과정에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에서 비켜났고, 그 결과 전북은 늘 후순위 지역으로 호명되었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은 단순한 평가에 그치지 않고, 어느 순간 도민 스스로의 인식 속에도 스며들었다. 소외되었고 차별받아 왔다는 경험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 경험이 반복되며 전북을 스스로 작게 규정하고 도전보다 체념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정체성으로 굳어졌다는 점이다.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현재의 선택을 통해 재정립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전북은 결코 주변부가 아니었다. 이 지역은 마한의 중심지였고,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적 기반이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며 국가 운영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했다. 특히 후삼국기 전북은 다시 한반도 역사 전면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성립은 단순한 정권 분립이 아니라, 기존 질서가 흔들리던 전환기 속에서 새로운 국가 모델을 모색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후백제의 시조 견훤이다.

견훤은 오랫동안 ‘패자’의 이미지로 기억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그를 단순한 반란 지도자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 질서를 구상한 정치 주체로 재평가하고 있다. 견훤은 백제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신라와 당, 그리고 해상 교류를 통해 유입된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무력만이 아니라 외교와 제도, 민심을 국가 운영의 핵심 요소로 인식했으며, 민생 안정과 애민을 통치의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이는 고대에서 중세로 이행하던 시기, 변화의 문턱에 선 국가가 갖추어야 할 혁신적 역량이었다.

이러한 후백제의 역사적 위상은 오늘의 전북 공간 질서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전주는 후백제 왕도로 기능했던 지역이며, 후백제 역사문화권의 중심이자 상징적 거점이다. 앞으로 전주는 단순한 도청 소재지를 넘어, 후백제 고도로서의 역사적 위상을 정립해 가야한다. 한편 익산은 백제 왕도의 핵심 지역으로, 고대 백제 문화의 정수를 간직한 도시다. 전주와 익산은 각각 후백제와 백제라는 서로 다른 시대의 왕도이지만, 고대와 중세를 잇는 전환기의 역사적 연속성 속에서 전북 정체성을 구성하는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후백제의 역사에서 오늘의 전북이 주목해야 할 가치는 분명하다.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선택한 도전정신, 외부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화한 개방성과 혁신성, 그리고 지역과 백성의 삶을 국가 운영의 근본으로 삼으려 했던 애민의식이다. 이 정신은 과거에 머무는 유산이 아니라, 오늘 전북이 직면한 정체와 무기력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실천적 자산이다. 후백제의 혁신성을 계승한다는 것은, 과거를 자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도민 의식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전북특별자치도는 제도적으로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그러나 제도의 변화만으로 지역의 미래가 열리지는 않는다. 변화에는 태도가 필요하고, 도전에는 도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이 필요하다. 이제 전북은 스스로를 소외된 지역으로 규정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역사적 자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지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2026년 새해와 6월 지방자치 선거를 앞둔 지금은 그 전환을 공론화할 중요한 시점이다. 모든 선거 출마자들은 ‘희망찬 전북’, ‘살기 좋은 전북’이라는 구호를 넘어, 전북이 어떤 역사적 정신을 계승하고 어떤 가치 위에서 미래를 설계할 것인지 분명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도민들 또한 후백제의 도전과 혁신 정신을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불러내며, 전북을 새롭게 만드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

전북은 결코 작지 않다. 후백제의 도전과 개방, 애민의 정신은 오늘의 전북이 다시 움직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자산이다. 전북이 스스로를 존엄하게 세우는 순간, 전북특별자치도라는 이름은 비로소 미래를 여는 힘이 될 것이다.

/노기환 온문화유산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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