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전북민주화운동사

대장정에 들어가며

<제2부>반유신운동과 긴급조치세대

<제3부> 80년의 봄

5월의 체험은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의 역사인식과 실천에 극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당대’를 묘사하는 것을 주요 책무로 삼아온 예술진영이 5월 광주에서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5월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회한을 먼저 담아낸 것은 문학이었고 그 뒤를 이어 여러 장르에서 5월의 의미를 소화해내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서울에서 1979년 창립된 ‘현실과 발언’과 이후 ‘두렁’등의 활동이 보여주듯 미술계에서 왜곡된 우리 현대미술사를 바로잡고 새로운 미학으로 당대의 민족현실을 담아내려는 노력들이 전국적으로 시도되었다. 미술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리얼리즘의 부활, 현장미술의 발전과 미술인의 조직화에 이르기까지 80∼90년대 미술인들의 노력은 여러 갈래로 지속되었다.

80년대 초중반 미술운동의 주요 화두는 목판화 운동이었다. 홍성담과 오윤의 판화그림이 보여주는 강렬한 선과 메시지는 당시 미술운동가들의 감수성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홍성담, 김경주 등이 주동이 되어 항쟁의 진원지 광주에서 불붙기 시작한 판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북에서 일단의 청년미술가들의 움직임도 이런 배경에서 연유하고 있었다.

1983년 10월 이리 창인동성당에서 열린 ‘땅전(展)’은 시와 그림이 만나는 형식을 취했다. 미술 쪽에서 송만규, 윤양금, 이영진 등과 시에서 김용택, 안도현, 강태형 등이 나섰다. 각자의 장르에서 막 발을 내딛기 시작한 젊은 ‘신예’들이었다. 광주항쟁 후 해남 등 지역에서 민중문화운동을 전개하던 소설가 황석영도 전북의 문화일꾼들을 북돋는 축하객의 역할로 자리했다. 당시 민족미술운동가들은 기존 미술(교육)의 관성과 개인적 세련성을 거부하고 질박한 민중 심성을 드러내는 그림을 주창하였다. 우리 민화에서 보이는 익명성과 집단성의 표출이 중요한 전범으로 부각되었고 미술도 세련된 화가의 개인주의 작품에서 민중과 관객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중시되었다. 창작자 개인의 고독한 작업으로만 여겨졌던 미술에 ‘운동’이 결합되면서 기존 미학과 창작방법론에 대한 일대 전복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관념적이고 개인 밀실에 갇힌 화랑미술에서 벗어나 당대 현실과 밀착할 것을 주창한 미술운동가들은 민중운동의 이슈와 현장에 적극 결합했다. 84년 ‘민중판화전(서울)’, ‘해방40년 역사전(전국 순회)’은 대학, 백화점, 성당 등의 공간에서 관객을 맞았고 이들 작품이 던지는 낯선 충격은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84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고조기에 접어들면서 벽그림과 걸개그림, 판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단의 미술가들은 거리투쟁에 쓰일 시위용 깃발, 현수막, 판화복사벽보, 걸개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지새웠다. 전시회도 잇달았다. 86년부터 88년은 전국 순회로 열린 통일전, 87년 서울과 광주에서 개최된 ‘반고문전’에 지역미술운동이 참가한 데 이어 88년 조성만 열사 추모제 기간 동안 전동성당 건물에 걸린 대형 걸개 그림을 비롯해 88년 12월 전동성당 담벼락을 전시공간으로 열린 ‘시민판화거리전’에 이르기까지 ‘유격적인’ 미술선전활동이 진행되었다. 가두투쟁시대, 가두미술의 급박한 요구에 부응한 작가들의 함성은 더욱 가파르게 솟아오르기만 했다.

1985년 초 전국단위의 미술운동을 조직화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지역의 현장활동을 강조하는 흐름과 개인창작과 발표활동을 중심에 놓는 흐름 사이에 갈등이 드러났다. 후자는 85년 11월 ‘민족미술인협의회’로 출범한다. 93∼94년 민미협 대표로 활동한 임옥상은 81~92년 전주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지역사회에서 미술작업을 했다. 임옥상, 김진술, 김인철, 이기홍 등이 참여한 ‘들·바람·사람들’은 80년대 후반에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다. 지역 대중운동과 함께 하며 현장미술을 강조한 흐름은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약칭 민미련)으로 모아졌다. 1988년 조직논의를 거쳐 89년 창립한 민미련에는 87년 투쟁의 흐름 속에 탄생한 겨레미술연구소, 전주청년미술공동체 등의 젊은 미술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지역미술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온다라미술관이다. 김인철 관장의 각별한 노력에 의해 90년대 중반까지 전주시내 중심가에서 5년간 유지되었던 온다라미술관은 문화적 변방으로 불리는 지역사회에 민족, 민중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소개하면서 새로운 미학과 예술창작, 대중적 유통의 산실 역할을 아낌없이 했다. 80년대 민족민중미술운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1989년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전으로 인한 대대적 구속 사태이다. 1989년 5·18 9주기 기념의 첫 미술행사로 제1회 5월제가 추진되었는데 ‘5월미술전’의 하나로 광주 금남로에 전시된 것이 ‘민족해방운동사’였다. ‘민족해방운동사’는 갑오농민전쟁부터 최근의 통일운동까지 우리의 근현대사를 민중사적 관점에서 형상화한 높이 2.6미터, 길이 77미터의 대형화폭에 담아낸 걸개그림이었다.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에 속해있는 전국 6개 지역의 단체와 30개 대학미술패 동아리가 함께 연대하여 제작하였다.

총 200여 명의 미술인이 동원되었고, 1989년 1월부터 3개월의 제작기간이 걸린 이 작품의 첫 시작부분이 전주 겨레미술연구소가 제작한 ‘갑오농민전쟁’이었다. 1894년의 농민봉기를 다룬 이 작품은 봉건지배계층의 학정과 농민군의 봉기, 전주 입성, 미일외세가 조정하는 중앙정부로 죽창을 들고 일어서는 농민군이 형상화되어 있다. 민족해방운동사 연작은 각 집단의 통일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내용 연결에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고, 열악한 조건에서 순회전시를 하면서 작품 훼손이 많았음에도 그 장대한 규모와 내용, 창작방법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과 감탄을 자아냈다. 원작은 89년 6월 한양대 전시 중에 경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슬라이드로 제작되어 그해 평양의 청년축제에 보내졌고 북측 화가들에 의해 복원되어 전시되었다. 공안당국의 대대적 탄압이 잇따랐다. 그림을 그린 대표 작가들인 홍성담, 차일환, 백은일, 전승일 등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고 민미련 의장을 맡았던 전북의 송만규는 도피자의 처지가 되었다. 이해 1989년은 대대적인 탄압의 와중에서 겨레미술연구소의 박흥순, 김은희 두 사람이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하는 등 지역미술가들에게 오래 잊혀 지지 않을 시련의 해였다.

1980년대 미술운동의 경험과 예술적 형상화의 성과들이 채 정리되기 못한 채 1990년대는 큰 변화의 국면이 전개되었다.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사회변혁운동의 퇴조, 리얼리즘을 밀어붙이며 등장한 의사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포와 IMF 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민중미술운동은 내부동력을 상실하고 각개약진의 형세를 수용해야만 했다. 민미련 등의 미술가운동조직은 해체되었고 개별 창작자들은 각자의 행보에 따라 미학적으로 재정립하면서 긴 모색에 접어들게 되었다. 1992년 민족자주미술전에 참여하고 시민미술교실을 여는 등 90년대 초반까지 흐름을 이어가던 겨레미술연구소도 민미련 해산과 흐름을 같이 하면서 문을 닫았고 이후 지용출, 유대수, 진창윤 등이 참여한 전북민족미술인협의회가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예전과 같은 울림은 적어졌지만 시위대의 전면에 나선 깃발그림과 대형 걸개그림은 여전히 집회현장을 장식하고 있다. 전투적 투쟁을 호소하던 예전의 그림들은 내려져 미술관 한쪽에 붙박여 있다. 현재 전북대학교 자연대학 벽면에 남아있는 대형벽화는 당대를 풍미했던 민족민중미술운동의 한 시간대를 홀로 남아 증거하고 있다.

/이재규 기획의원

/한재일기자 hji@sjbnews.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