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한옥마을의 태조로 옆에 위치한 작업실. 밖에서 보면 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자칫 폐허로 오인할 만큼 오래되고 허름하고 낡은 건물이 있다. 좁은 문을 통해 들어서면 작은 마당에 굵은 나무판들이 쌓여있다. 얼핏 목재소가 연상되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모두들 작품으로 재탄생하기를 기다는 원자재들이다. 작업실 내부의 바닥에는 대패, 톱, 끌칼 등 갖가지 공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벽면에는 주인장의 혼이 묻어나는 완성작들이 앞다퉈 인사한다. 임채준(48) 작가가 10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일구워낸 결과물이다. 

 

임씨가 서각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할머니가 인터뷰를 통해 성경의 창세기부터 끝까지 서각에 새기고 싶다는 순수한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며 서각에 눈을 돌리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그 뒤 10여년 전 벽조목(霹棗木, 벼락맞은 대추나무)에 도장을 새기기 시작했다. 중학교때 고무판화로 입상을 경험할 만큼 타고난 손재주가 있던 임씨였기에 가능햇다.

도장을 새기는 작업을 하다가 방향을 선회한다. 본격적으로 서각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스승을 만나고부터다. 그의 스승은 당시 전통서각보다 현대서각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최수일(57)씨다. 전국에서 줄잡아 2천명 정도 되는 서각인구 중에서 최씨는 서각의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며 새롭게 개척, 현대서각을 창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승으로부터 현대서각을 익힌 임씨는 전통서각과 현대서각은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전통서각이 서예를 토대로 현판 등에 글씨를 새기는 방식인 데 비해, 현대서각은 자신이 직접 글과 글씨, 그림 등을 다양한 색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전통서각이 기능적 측면이 강한 반면 현대서각은 창의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 용도 면에서는 전통서각이 사찰이나 건물 등의 현판에 사용되지만, 현대서각은 개개인의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서는 차이점이 있다. 임씨는 현대서각의 특성에 매료, 또다른 흥미를 느끼며 심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떠돌다가 8년 전부터 한옥마을로 들어와 작업을 시작했다. 서각은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맘 먹었다. 그리고 쉬지않고 작업메 몰두했다. 남들이 하루 50점을 만들때 500점을 만들고자 했다. 밤새워 작업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재정적으로 빈궁한 상태인데 은행나무 등 재료들이 너무 비쌌다. 여기저기서 구걸하듯 구입해다가 작업하곤 했다. 하지만 구매자가 별로 없어 땀흘린 대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너무 춥고 배고파서 그만 두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곰곰이, 그리고 냉정히 스스로를 평가했다. 왜 팔리지 않을까. 방법이 무엇일까. 그런 뒤에는 한동안 전국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서예, 도예, 목공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터득하기도 했다. 길을 찾고자 궁리한 끝에 '자필자각'을 시작했다. 모든 공정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서각이 손재주만 좋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좀더 소비자에게 가깝게 다가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때부터 서예를 배우고, 책을 섭렵하며 그림도 배우기 시작했다. 4년동안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옛 선비들이 '시(詩)?서(書)?화(畵)'에 능통했던 것처럼 각 방면의 능력을 키워왔다.

"현대서각은 손재주는 물론이고 그림, 글씨, 글 등의 요소가 갖춰져야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른바 종합예술적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필수과목인 셈이다. 다소 장인정신과 기질에 어긋난다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이제 소비자의 기호를 따라가야 한다고 본다"

임씨는 수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 이유는 글이 좋아서다. 이태준의 '무서록' 중에 나오는 글귀다.

차갑더라도 풀 먹인 옷은 다듬잇살이 올라야 하고 덧문까지 봉하더라도 차야만 겨울맛이라. 저녁상에 된장이 향그러운 날은 으레 바깥날이 찼고 수선(水仙)이 숭늉 김에 얼었던 고개를 들고 안해의 붉은 손이 동치미 그릇에서 얼음쪽을 골라내는 것은 먹어봐야만 느낄 맛이 아니러라. 겨울이 너무 차다는 것은 우리의 체온이 너무 뜨거운 때문, 우리 역시 상설(霜雪)이나 매화같을 양이면 겨울이 더워선들 어찌하랴.



이 글을 그토록 간직하는 데는 임씨가 겪어온 삶의 궤적이 담겨 있어서다. 하여 소중하게 보관하며 좌우명처럼 보고 또 본다고 한다.

"서각은 소비자가 감흥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씨와 채색은 물론 좋은 글귀를 담아야 한다. 그래서 그 동안 한시, 논어, 명심보감, 채근담 등을 섭렵했다. 이 중에서 맘에 드는 글귀를 모은 것만 해도 수백가지다."

예로부터 서각은 기능인에 가까웠다. 글씨를 받아 조각하는 목공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천대받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서각은 독창적이며 창의적인 작품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제 서각이 나의 천직이 된 것 같다. 세상사를 논하거나 배고픈 현실을 생각하면 혼란스럽다. 그러다가도 작업을 위해 칼을 잡으면 절로 차분해지고 마음이 편하다"

20년 고난의 세월 끝에 비로소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특히 글씨체, 이미지, 색깔, 농도 등 임씨 고유의 스타일을 정착시키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에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더라도 소비자와 소통이 없으면 이미 자기만의 작품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작품도 산업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산업화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그도 잘 안다. 예술계에서 흔히 통용되는 얘기중에 '예술작품을 소장하는 인구가 늘기 위해서는 국민소득 3만불은 돼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문화수준이 높다 하더라도 경제수준이 높지 않으면 예술작품에 대한 구매욕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더더욱 작품의 기능과 함께 산업적 기능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게 임씨의 지론이다.

"서각은 이제 생활속의 작품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작업실 안에서 박제되는 작품이 아니라 시장에서 소비자와 소통하는 상품으로서의 기능이 필요하다. 이제 그 길을 개척하는 게 남은 숙제이기도 하다."

/박규만 기자 pkm@sjbnews.com



■ 명장 임채준 프로필

아호:하유당(何有堂)

2003 세계서예 전북 비엔날레 서예술 실용화전(한국소리문화전당)

2005 한국서각협회전(부산)

2006 한국 서각협회 공로상

2007 한국 서각 협회전(예술의 전당 서예 박물관)

2008 1회 개인전 (전북예술 회관)

2008 한중 국제 공예 교류전(전주 국립 박물관)

2008 2회 개인전 (인사동 서울 미술관)

2008 국제각자연맹전(중국)

2008 한국 서각 협회전(예술의 전당 서예 박물관)

2008 국제 각자 연맹전 (중국)

2009 한국 서각 협회전(예술의 전당)

2009 청주 세계 공예 비엔날레 아트 페어전

2009 전라북도 공예 명품 초대전

2009 12월 愛(사랑) 나눔전 (전주 공예품 전시관)

2010 한국서각협회전(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前) 대한민국 서예문인화대전 심사및 초대작가

現) 대한민국 아카데미 미술대전 심사및 초대작가

대한민국 남북통일 예술대전 심사및 초대작가

전라북도 서예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각대전 초대작가

한국서각인물사편찬 추진위원

전주 전통공예전국대전 운영위원

전라북도공예협동조합 명인명장 선정심의위원

전주 한옥마을 태조공예 운영

사)한국서각협회 전북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