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밑에 쓰인 문장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이었는데요. 그런데 같이 갔던 정민이가 그 문장을 그림에 대응해 볼 때 맞는 말이라고 물어보더군요. 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제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문장 위에 있는 것은 분명히 파이프 그림이지 파이프가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의문점이 생기는데 파이프라는 기호가 실제 파이프와 영원히 대응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란다. 더불어 대응할 수 없다면 선아 생각으로는 실제 파이프를 지시하는 ‘파이프’라는 기호는 무엇을 지시한다고 생각하니? 지시체와 만날 수 없는 기호는 우리가 꼭 써야 하는 것이니?

선아: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의 직관으로는 그저 맞는 말이라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추가적이고 심층적인 사고를 하기 힘듭니다. 이것이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면 제원 샘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제원: 전통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기호는 지시체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단다. 예컨대 송아지라는 기호와 실제 송아지(지시체)간에는 상응, 일치관계가 있다는 것이란다. 따라서 기호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어떤 사물이나 기호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를 대신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단다. 하지만 이런 믿음에 이의를 제기한 언어학자가 있단다. 소쉬르라는 언어학자인데 그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완전하게 부정해 기호와 지시체간에는 어떤 유사관계나 일치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단다. 즉 기호를 자의적인 어떤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단다. 예를 들어 ‘시계’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런데 샘이 지금 발음하는 시계는 실제의 시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단다. 이 물건을 가리키기 위해 ‘티계’나 ‘치계’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란다. 시계라고 발음하기로 한 것은 단지 사회적인 약속일 따름이란다. 새로 약속을 바꾸어 ‘티계’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전에서 ‘티계’란 철자를 찾으면 되는 것이란다. 이런 식으로 기표는 그 대상과 무관하게 사용되거나 바뀔 수 있는 것이란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욕할 때는 주로 격한 소리의 기표를 쓴다던가, 어두운 느낌을 표현할 때는 어두운 소리의 기표를 사용한다든가, 의성어나 의태어를 쓰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단다.

선아: 그러면 사물의 이름을 단어라고 할 수 없겠군요.

제원: 황당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단다. 예를 들어 ‘그리고’나 ‘언제’처럼 단어는 사물의 이름 아닌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단다.

선아: 와~ 재밌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데요. 그러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제원: 그것은 그 단어의 용법(use)이라고 할 수 있단다. 즉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의미는 결정되는 것이란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단다. 예컨대 우리는 ‘mother’나 ‘now’, ‘when’ 등의 단어를 영국인이 사용하는 것을 반복해서 보고, 그걸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배움으로써 그것의 의미를 안다는 것이란다. ‘water’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알다시피 ‘물’이라는 뜻 아니겠니? 그런데 똑같은 이 한마디의 말이 그게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겠지. 만약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물병을 가리키면서 ‘water’라고 했다면 ‘이건 물이야’ 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water’라는 단어를 배운 꼬마가 밥을 먹다가 ‘water’라고 했다면 그것은 ‘물을 주세요’ 라는 의미이겠지. 만약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던 어떤 사람이 ‘water’라고 했다면 ‘물이야, 이젠 살았다’라는 뜻이겠지.

선아: 그렇군요. 이런 의미의 차이는 동일한 단어가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겠지요.

제원: 정확하게 이해했구나. 헐~ 그러고 보니 퇴근시간이 되었구나. 추가적인 질문은 제원 샘의 논리 · 논증 · 논술교실(http://cafe.naver.com/pjwlogic)에서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자.



* 핵심논지

1. 강아지가 속하는 기호의 영역과 강아지가 속하는 대상의 영역은 독립적

2. 말의 의미는 쓰임에 있을 뿐


/박제원(완산고 사회교사, 전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지원단 자문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