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 일으킨 구산선문의 으뜸 실상 추구함에 있어 가장 충실…
선풍 일으킨 구산선문의 으뜸 실상 추구함에 있어 가장 충실…
  • 김판용 시인.금구초중 교장
  • 승인 2014.10.3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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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전북의 사찰] 지리산 실상사(상)
▲ 동트는 새벽 실상사 전경

 


실상사로 가는 날 새벽길 안개가 짙게 깔렸다. 새벽에 피어오르는 안개는 어둠과 버무려져 칙칙하게 밀려온다. 운전자에게 새벽안개는 그야말로 대책이 없는 장애요소이다. 아무리 헤드라이트를 켜도 앞이 안 보인다. 이럴 때 오리무중(五里霧中)은 얼마나 호사인가? 오리는 커녕 몇십 미터도 밖의 물상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무조건 속도를 줄이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느끼는 그 감각은 제대로인가? 이 실상을 찾기 위해 인류는 부단히 노력해 왔다. 철학과 종교가 기울인 실상(實相)의 본질은 길고 긴 여정이었다. 불교가 규정하는 실상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일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공(空)한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각, 지각, 의지와 인식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공(空)은 ‘무(無)’와는 전혀 다르다. 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공은 존재는 하되 영속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소멸을 통해 삶을 영위해 간다. 사상(事象)이 영원할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매시간 변해간다. 그러니까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은 것이라면 백년이 지나도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어디 있던가? 한순간도 같은 것이 없다. 무상한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그 공허함을 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불변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바로 그 경지가 실상일 것이다. 이를 찾기 위해 먼저 나선 것이 교종(敎宗)이었다. 교종은 이론을 통해 실상을 찾으려 했다. 아니 실상을 찾기 위해 다양한 이론들을 제기했다. 그런데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경지였다. 자연스럽게 지식인을 비롯한 기득권층이 주도했고, 그들의 부와 권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교종이 기득권층을 굳건히 지켜나가자 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선종(禪宗)은 문자를 몰라도 깨닫는 길을 찾는다. 달마 이래 중국에서 종풍이 확립되어 신라 후대에 한반도에 들어왔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을 내세우듯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선종을 풀어보면 ‘선(禪)’은 단순하게(單) 보는(示)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안에 헛된 것이 없는 본질이자 실상의 세계이다. 글을 몰라도 깨달을 수 있음이니 누구나 선(禪)을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중 불교의 길이 열린 것이고, 그 종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한국불교의 정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원주 근방에 거돈사와 법천사라는 절이 있었다. 지금은 폐사지가 되었으나, 한 때 번성했던 사찰들이다. 두 사찰 사이에 작은 고개가 하나 있는데 양쪽 승려들이 서로 싸우다가 13명이나 죽었다고 한다. 문자를 멀리한 선종(禪宗) 사찰 거돈사와 학문을 내세운 법상종(法相宗) 사찰 법천사 간에 벌어진 사상투쟁 때문이었다.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처럼 공존하기 어려운 것처럼 갈등이 첨예했던 것이다.

그런 대립의 시기에 고승들은 선교일체를 주장하며 두 사상을 융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그 선종의 문풍(門風)을 일으킨 아홉 산문(山門)을 구산선문이라 하는데 실상산문(實相山門), 가지산문(迦智山門), 사굴산문(??山門), 동리산문(桐裏山門), 성주산문(聖住山門), 사자산문(獅子山門), 희양산문(曦陽山門), 봉림산문(鳳林山門), 수미산문(須彌山門) 등이다. 그중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이 바로 실상산문이다. 사찰 이름에서 선종이 추구하는 단순히 보는 것, 즉 실상을 추구함에 있어 가장 충실한 사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실상사는 원래 지실사였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지실사는 백장암 자리에 있다가 사세가 커지지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실상사로 불린 것은 고려 초라고 한다. 실상선문의 개산자인 홍척(洪陟)의 시호 ‘실상선정국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구산선문의 사찰들이 다 그렇듯 국가의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홍척은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을 깨우쳤다.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웠고, 홍척은 실상사를 세운 뒤 선종을 전파했다. 중국에서 선종을 공부한 홍척을 830년 무렵 흥덕왕과 선강태자(宣康太子)이 경주로 초청했다. 왕권을 위협하는 성골귀족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교종의 승려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촉망받던 유학파 선종 승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적 지원이었다. 마치 이는 조선 중기 왕들이 세력이 강해진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람 학자들을 끌어들인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런 저런 상념이 안개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는 사이 실상사 입구에 도착했다. 실상사는 들어가는 길이 여느 절과 다르다. 보통 절에 있는 일주문이 없다. 일주문은 속세와 피안을 나누는 경계이다. 어쩌면 그걸 나눌 필요가 없다는 종풍의 의도에 맞춰 일부러 세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표소를 지나 해탈교를 건너면 아주 평범한 들판이 나타난다. 그냥 평지라서 절로 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해탈교를 건너기 전에 왼쪽에 돌장승이 떡 버티고 있다. 반대편에도 있었으나 1963년 홍수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크기가 3미터에 이르는 큰 장승으로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砂逐鬼將軍)’ 이라는 글씨가 몸통에 조각돼 있다. 악귀를 쫓는 수호신으로 해탈교 사방에 세운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 또 두 기의 돌장승이 더 있다. ‘대장군(大將軍)’과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이들 장승들은 다리의 양쪽을 지키면서 월천극락의 절대 세계로 신도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논길을 따라 간다. 이미 반쯤은 추수가 끝났다. 추수가 끝난 들판의 휑함을 안개가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말라는 듯…… 그래서인지 황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실상사 첫 번째 전각인 천왕문을 지나자 안개 속에 고요한 실상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새벽이라 아무도 없는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선 심층석탑과 가운데 석등이 어서 오라 반기는 듯하다. 그리고 농무를 뚫고 아침 해가 떠오른다. 역광으로 빛나는 석조들의 실루엣이 눈부시다. 어쩌면 나는 이 풍경을 보기 위해 그 짙은 안개를 헤치고 온 것은 아닐까?

/김판용(시인.금구초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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