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오롯이 간직한 정조 효심과 동행하다
수백 년 오롯이 간직한 정조 효심과 동행하다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5.06.03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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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30> 안양 만안교
▲ 만안교


전철 1호선 관악역 1번 출구로 나가 안양역 방향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7개의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 돌다리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안양의 자랑거리이자 안양 8경중의 하나인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인데요.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가 수원 화성으로 갈 때 건넜던 돌다리로, 그의 효심이 엿보이는 상징물에 다름 아닙니다.삼막천에 자리한 만안교는 한국의 100대 아름다운길로 선정된 바 있으며, 다리 위에는 요즘도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으며, 종종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 만안교



정조는 음식을 먹으면서 백성을 생각하고 나랏일을 생각하며 평생을 하루에 2끼만 먹었다고 하는데요. 백성들이 비단옷을 입을 때까지 삼베옷을 입겠다고 고집했던 임금이었습니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그리움과 효심이 가득했던 정조이기도 했는데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만으로도 정조의 효심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이라고 했는데요. 이는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고 합니다.

정조의 효심이 느껴지는 지지대(遲遲臺) 고개가 있는데요. 수원과 의왕 경계를 이룬 곳이다. 예전 명칭은 사근현(沙斤峴)이었으며 또는 미륵댕이 또는 미륵당 고개로 불렸으나 지금은 '지지대 고개'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느리고 더딜 '지(遲)자를 쓴 지지대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지나고 돌아오던 언덕에 위치합니다.

▲ 만인교비



화산의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이 고개에서 어가를 멈추어서게 하고 한참을 머무르며 부친의 묘역이 있는 화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 아버지 장조가 묻힌 현륭원이 있는 화산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지대고개에서는 1807년 순조의 명을 받아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비문을 짓고, 윤사국이 글씨를 쓴 '지지대비(碑)'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가는 길은 원래 노량진을 통해 과천으로 넘어가는 길이었습니다만, 그 길 고갯길로 지나는 길목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처벌하자는 김약로의 묘가 있어 그 묘를 피하려고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향하는 길을 택하면서 안양천을 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의 행차로에는 나무다리를 가설했다가 왕의 행차가 있은 뒤에는 바로 철거하고, 행차가 있을 때 다시 가설하곤 했는데요. 정조가 이 길을 다닐때에도 임시로 나무 다리(정조 18년, 1794년)를 놓아 사용하였는데, 다리를 놓았다 헐었다 하는 번거로움과 다리를 이용할 수 없는 백성들의 고충이 있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돌다리인 만안교(萬安橋)를 1795년(정조 19년)에 놓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으로 3개월 공사 끝에 만안교를 완성했는데요. 만안교가 있던 당초의 자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약 460m 떨어진 석수로 교차 지점에 있었습니다. 1980년 국도확장을 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복원했습니다.

▲ 한국의 100대 아름다운길로 선정된 만안교



만안교의 규모는 원래 길이 15장(약 30m), 폭 4장(약 8m), 높이 3장(약 6m)이고 홍예수문(虹?水門)이 5개라 했는데, 현재는 홍예가 7개인 것으로 보아 시공 당시에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홍예는 정교하게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써서 반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는 장대석을 깔아 노면을 형성했습니다. 하천 바닥엔 두께 30~40㎝ 정도에 가로ㆍ세로 70~80㎝가량의 박석을 바닥돌로 깔았는데, 그 면적이 954.8m²(30.8×31mㆍ289평)에 이릅니다. 이는 큰물이 질 때 물살에 바닥이 파여 교각이 붕괴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입니다. 또. 물이 흘러드는 북쪽의 받침돌을 마름모꼴로 앉힘으로써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축조 양식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 석교로 평가됩니다. 만안교는 수원화성 화홍문이 연상되었습니다. 반달모양의 7개 수문이 닮은꼴인데요. 수원화성에 있는 홍예는 화홍문을 받치는 수문이지만, 만안교는 교량으로서 전용 다리인 점이 다릅니다.

만안교의 홍예문은 장대석을 이용, 아치모양 이루고 그 위에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으로 상판을 깔았습니다. 하천 바닥에도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판석을 깔았다고 하는데요. 바로 옆으로는 자그마한 소공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원이라고 해야 아이들의 놀이시설 기구가 전부인데요. 그 옆으로 고풍스럽게 자리잡은 만안정이 멋쩍어 보이기도 합니다. 만안정과 더불어 만안교 주변으로 시민들의 쉼터 공간이 더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다리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른 바 만안교 비는 상상의 동물로 만든 귀부와 그 위에 만안교 축조 이야기를 새긴 비신, 그리고 비신 위에 얹은 지붕돌인 가첨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상상의 동물을 표현한 귀부는 사악한 기운을 막으려고 과장되게 표현되었습니다. 만안교는 돌다리이면서 삼막천의 물줄기만 통과시키는게 아니라 마지막 7번째 수문은 삼막천에서 안양천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공간으로 시민들이 직접 걸으며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옮기고 복원하면서 생겨난 현상일텐데요. 굴다리를 통과하듯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바로 만안교입니다.

▲ 만안교 다리 보호하기 위해 하천 바닥에도 판석을 깔았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새로운 조선을 꿈꾸며 이 다리를 건넜던 정조는 안타깝게도 자신을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조의 개혁 실패는 조선의 개혁 실패였고,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죽음이었습니다. 정조가 죽으면서 개혁 정치는 수포로 돌아갔어도, 정조는 끝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조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곳곳에 남아 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만안교입니다./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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