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절기에 접어들면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는 횟수가 잦아집니다. 몰론 잘 낫기도 합니다. 예전에 넷째 딸은 코를 훌쩍이며 다녔는데 나름 외향적이라 겨울철에도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동네 이모가 "누가 애 보고 병원장집 딸이라고 하겠어? 시골 촌년이지" 하고 우스갯소리도 합니다. 막내 딸내미도 감기를 달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이 자꾸 감기에 드는 것이 저의 지독한 무관심과 게으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난해 독감 예방백신을 가져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놓아달라는 안식구의 부탁을 가까스로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매번 집에 들고 오려고 준비는 다 해 두었는데 정작 집에 가져오는 것을 잊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겨울이 금새 지나가버렸습니다. '가까스로'라는 표현을 한 이유는 일종의 '태업'과 같은 의미입니다.
감기는 아이들에게 예방해야 할 심각한 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젠가 지인이 화급히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뉴질랜드에 사는 형수가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너무 당겨서 척추 전문의에게 국제 전화로, 원격진료를 받는 셈이었습니다. 마침 1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우리 병원에서 찍은 MRI 가 있어 그것을 참조하며 환자의 호소를 들었습니다.
"내일 이라도 병원이라도 한번 가보시지 그래요" "괜찮다고 운동하라고 하는데요"
"말씀을 들어보니 전에 요추5번과 천추1번 사이에 디스크가 조금 있었는데 그것이 크기가 좀 더 커진 것 같습니다. MRI를 한번 찍어보세요" "x레이 찍는 데도 2주 이상 걸렸는데요. MRI 는 일 년 이상 걸립니다"
의료비가 너무 비싸 한 달에 우리 돈 100만정도의 사보험을 넣어야만 그나마 우리나라 일반 진료 정도로 편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서가 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데 이 정도라면 가끔은 진료를 기다리다 마비나 영구 장애가 생기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겠다는 유추도 해봄직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한국은 누가 이야기 하듯이 "편의점 가듯" 아주 편하게 병원을 이용합니다. 예약을 해서 2~3 개월 기다려야 진료를 볼 수 있는 유명한 의사 선생님들도 종종 계시지만 착하게도 초진료 1만원을 넘기지는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난 2002년 통계로 보면 건강보험대상자 4,650만3,000명 가운데 약 88%인 4,069만3,000명(한방제외)이 병. 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가운데 거의 27%가 만성 질환으로 꾸준히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외래 진료중 부동의 1위는 단연 '감기'입니다.

그러나 의사들 간에는 흔히 "감기 치료제를 발명하면 노벨상 감"이라고 합니다. 왜나면 감기 바이러스가 200여종이 넘으며 또한 그것들의 DNA 가 쉽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몸은 기침이나 콧물로 바이러스나 그 사체를 몸 밖으로 몰아내고 체온을 높여 외부의 적과 맞서 싸우는 백혈구를 활성화시키는 방어책입니다. 그런데 기침을 너무 억제하고 열이 오르는 것을 무조건 약으로 억누르는 것이 면연력에는 도움이 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아과 의사가 쓴 '건강해지려거든, 감기에 걸려라' 라는 책도 있지만 너무 약에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몰론 감기를 너무 간과하면 중이염, 폐렴 등으로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증상이 심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한 독감' 에 대해서 WHO 세계 보건기구에서 그 해에 유행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바이러스 형에 대한 예방 백신을 투여하지만 일률적으로 백신 접종을 하는 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면역력 향상을 위해 '절대로' 약을 먹지마라는 권고를 하는 게 아닙니다. 항간에 광고를 보면 "절대 척추 수술 하지마라!", 또는 "절대 약 먹지 마라!" 등의 광고를 보면 "다 내게로 오라" 하는 식의 또 다른 상업광고처럼 보여 '절대' 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대통령 탄핵 이후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심각한 감기 때문에, 온 국민이 열이 오르고, 밤새 기침하여 잠도 못자고, 목이 쉬고 때로는 콧물이 질질 나오는 증상을 겪고 있습니다. 어쩌면 정경 유착도 끊고, 부정부패도 근절시켜 면역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데도 지금까지 해왔던 관습대로, 또는 파장이 심하여 심각한 사회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식으로 봉인하고, 더 시급한 경제 문제가 눈앞에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립니다. 감기 증상이 너무 괴롭다는 이유로 아이가 기침 좀 한다 싶으면 무조건 감기약부터 처방해 먹이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기침과 콧물과 가래는 감기를 이겨내는 건강한 신체 반응입니다.
/전주 우리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