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는 곳을 좇아 좋은 밭과 넓은 집이 있어 산을 등지고 냇물이 앞으로 흐르고 돌랑과 연못이 둘러 있고 대나무와 나무들이 둘러 쌓고 타작마당가 채소밭이 앞에 있고 과수 나무들이 뒤에 심어져 있다. 배나 수레로 걷거나 건너는 어려움을 중분히 대신하다. 사령이 있어 몸으로 하는 수고를 충분히 대신해 준다. 부모님을 봉양함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고 처와 자식에게는 몸을 괴롭히는 수고가 전혀 없도다. 좋은 친구들이 모여 와 머물면 술과 안주를 차려서 즐기며 좋은 때 좋은 날이면 양과 돼지를 삶아 받든다. 밭과 동산을 거닐면서 평지의 숲에서 즐기며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시원한 바람을 따라가며 물에 헤엄치는 잉어를 낚시질하며 높이 날아가는 기러기를 화살로 잡고 기우제 제단의 아래에서 풍간하며 고당(高堂)의 아래로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

필자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아석(雅石) 소병순(蘇秉順)의 글씨 ‘낙지론(樂志論, 중장통(仲長統)이 지은 문장으로 고문진보(古文眞寶)후집(後集)에 기록됨))’을 보면서 이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순암 안정복은 ‘낙지론 뒤에 쓴다.(題樂志論後, 제악지론후)’를 통해 ‘가난한 선비가 살림살이는 옹색할망정 조물주에 다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기쁘다. 숲과 꽃을 힘들여서 재배할 일도 없고 못을 파고 폭포 만드는 공사는 벌리지도 않는다. 물고기랑 새랑 제풀에 와서 벗이 돼주고, 시내와 산은 집을 에워싸고 창문을 보호한다. 그 속의 참 즐거움은 천 권의 책에 있나니 손길 가는 대로 뽑아 보면 온갖 잡념 사라진다'고 하지 않았나.

남정 최정균선생을 사사한 그는 익산 출신으로, 전북도전 특선, 추천 작가, 심사위원을 비롯, 부산시전, 인천시전, 전남도전, 경기도전 등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창암 이삼만 선양회 회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는 고전을 철저히 익히고 재해석해 걸러낸 다음 유불선(儒彿仙)을 녹여낸 표현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물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굳세고 예스러움이 조화를 이룬 행초서(行草書)가 특히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이다.

채근담 1만 2600자, 명심보감 1만 1200자, 도덕경 5000자 등 방대한 분량을 일필휘지로 풀어내 동양철학의 깊이와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준다.

"1971년 전북도전에서 서예 분과 최고상을 타면서 국전에 출품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연거푸 세 번 떨어지면서 붓을 꺾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ㅇ디같은 고비를 잘 넘기니까 다시 붓이 편안해졌어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을 좋아 하는바, 모든 게 다 마음 먹기에 따라 달리지 않았나요"

작가가 휘호한 대나무는 꽃이 필 때, 비가 올 때, 바람이 불 때로 제각각 모양새를 달리한다. 완산8경으로 꼽히는 덕진공원 연꽃은 붉은 빛으로, 개울가에서 튀어나온 개구리는 초록빛으로 그 생생함을 더한다. 

2010년 5월 5일 중앙동서실에서 만난 작가는 “작품 옆에 이파리 하나, 나뭇가지 하나 그려 넣다 보니 여기까지 왔나싶다”면서 “서예와 회화의 장점을 두루 사용하는 가운데 다양한 필체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 이를 뒷받침해 줄 문인화를 형상화하는데 힘쓰겠다.”고 했다. 

‘세상을 초월한 위에서 놀며 천지의 사이의 사물을 곁눈질하며 시대의 책임을 맡지 않고 타고난 목숨의 기간을 영원히 보존한다. 이와 같이 하면 하늘을 넘어서 우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제왕의 문으로 들어감을 부러워하겠는가?’

그가 쓴 ‘낙지론’ 후반부를 보면서 가을을 감미롭게 맞이하는 오늘, 내 눈이 호사롭기만 하다./글 이종근기자, 사진 이철수(사진가. 용담호사진문화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