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5.14 17: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전자전의 심법과 행실이 널리 두고
우러러 회자된다면 실로 아름다운 일”
양 은 용-수필가, 원광대 명예교수
양 은 용-수필가, 원광대 명예교수

아버지와 아들은 효(孝)의 상징이다. 옛부터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본'이라 했으니, 집안에서의 효가 밖에 나가면 충(忠)이 되는 이치이다. 그런데 이에 예술혼을 실으면 어떻게 될까? 예향인 호남지방에 이름 높은 유재(裕齋 宋基冕, 1882-1956)선생과 강암(剛菴 宋成鏞, 1913-1999)선생의 부자가 그러한 경우이다.
원광대 김삼룡총장의 열반을 당하여 빈소가 마련된 원불교 익산총부의 대각전에 송하진 지사가 찾아왔다. 그때는 전주시장직을 마치는 시기였다. 안내를 맡아 서예가인 지사에게 현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행서로 쓴 「정신수양(精神修養)․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라는 삼학(三學) 글귀였다.

“이 작품 어떻습니까?”  “참 좋습니다”
“아버님(강암선생) 글씨와 닮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많이 다릅니다”
찬찬히 감상하는 지사께 조부인 유재선생의 1935년 작품임을 알려드리고, 「대각전(大覺殿)」이라는 현판도 보여드렸다. 일제시대인 당시 대각전을 낙성했을 때, 교조인 소태산대종사(少太山大宗師 朴重彬, 1891-1943)를 만나 이룬 것이다. 송지사는 한 동안 숙연하게 작품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유재선생의 작품은 익산시 여산의 「여산송씨 시조묘비」에서 보는 것처럼 글씨에 단아탈속(端雅脫俗)한 품격이 드러난다. 그런데 대각전의 현판은 웅혼활달(雄渾豁達)하여 생동감을 갖게 하니, 또다른 특징으로 오랜 기간 여러분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종사의 열반 후, 해방과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에 비로소 기념비를 세울 때 강암선생이 전서(篆書)한다. 유재선생의 인연을 이은 것으로, 당시 종법사인 정산종사(鼎山宗師 宋奎, 1900-1962)가 찬술한 이른바 「원각성존비(圓覺聖尊碑)」인데, 4면비에 1,957자에 이르는 대작이다. 글이 그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중후하면서도 기개가 넘치는 유려한 필체라, 헤아려보니 강암선생의 42세때 작품이다. 작품의 성격이나 무게, 혹은 대중에게 받들리는 면에서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유재선생과 강암선생은 이처럼 우리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부전자전의 심법과 행실이 널리 두고 우러러 회자된다면 실로 아름다운 일이다.
유재선생은 뵙지 못했지만, 강암선생은 서책의 제자(題字)를 모시는 등으로 해서 자주 찾아뵈었다. 생활상에서 가까이 서예와 문인화, 그리고 금석문 등 여러 형태로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찾아뵐 때마다 작품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물론 강건하고 단아한 운신으로 맞이하는 언어응대에서 항상 옷깃을 여미게 하셨다.
아마 그 가르침이 가계의 안밖에 두루 미친 것이리라. 동양철학계의 원로인 성균관대 송하경 교수를 비롯한 자제분들은 물론, 한의학자인 원광대 동료로 일찍이 작고한 김세길 교수 등 외손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업과 함께 서예에 일가를 이루었으니 말이다. 과연 가계를 잇는 가르침은 고귀한 일이다.
전주시 전주천동로의 「강암서예관」에는 강암선생의 작품이 잘 전시되어 있다. 가계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살필 수 있으니, 이 지역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를 가지고 작품이 남아 있는 현장을 찾으면 그 감흥은 더욱 커진다.
아버지 유재선생을 이은 강암선생의 한복에 망건을 쓴 모습이 예향의 자랑으로 되살아나고, 애고(愛顧)의 가르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많이 본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