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인문학] 과연 천도는 공평무사하며, 정의로운 인간의 곁에 있는가?
[그림인문학] 과연 천도는 공평무사하며, 정의로운 인간의 곁에 있는가?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6.13 15: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림, 인문학을 엿보다 30-사마천 & 김정희

“안타깝지만 세상인심이란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사람은 송백 같지 않고,
그런 사람이라도 하늘의 보상을 기대할 수 없거든요. 천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고 말하지만 정말 천도가 있을까요?”

채하: 故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서거하신지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故 김대중 대통령님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셨는데 세월이 흘렀어도 안타까움은 사그라지지 않는구나. 그가 남긴 유언 -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 을 새기면 새길수록 어느새 콧등은 시큰하고, 심장에서 슬픔이 분수처럼 흩어진다.
선아: 저도 그렇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은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늘 보여주신 분이라 더욱 애절합니다.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지위는 티끌이거나 사족에 불과이었으며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한 한낱 도구에 불과했거든요.

채하: 선아야, 오늘은 그림을 통해 2100년 전이지만 마치 노무현의 분신(分身)이듯이 ‘인간의 삶’을 보여준 역사적 거인을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물론 그 그림을 그린 화가도 뛰어난 실학자이자 금석학자이기도 하다.
선아: 노무현 대통령님과 비교할 정도로 거인이라고 하니 더욱 관심이 갑니다. 누구인가요?
채하: 중국 전한시대 무제 때의 사학자이자 문학가, 사상가인 사마천(司馬遷)이다.
선아: 동양뿐 아니라 세계적 고전으로 손꼽히는 사기(史記)를 지은 사성(史聖)사마천을 말씀하시나요?
채하: 맞다.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를 썼지.
선아: 사마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겠어요?
채하: 사마천은 용문 지금의 산시성 한청 사람으로 자는 자장(子長)이다. 어려서부터 고전을 공부하고 유학자 공안국, 동중서로부터 학문을 배웠던 그는 20세 무렵 아버지의 권유로 견문을 넓히고 역사가로서의 자질을 기르기 위해 전국을 답사했다. 벼슬길에 나서서 한 무제를 수행하여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는데 이러한 현장경험이 사기를 저술하는데 크게 도움을 줬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인 무제 시절은 한나라의 전성기였고 40대에 접어든 사마천은 조정의 일과 사기의 진술이라는 두 과업을 해내며 바쁘게 보냈다. 역사편찬을 총괄하는 태사령에 임명 된지 47세가 되던 BC 99년 사마천은 인생에 중대한 전환이 되는 사건을 맞게 되는데 ‘이릉의 화’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한나라의 명장인 이릉이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다. 즉 왕과 권력자들은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고 사마천은 이릉과 친하지도 않았지만 그 논의의 부당함을 밝히고 이릉을 변호하다가 옥에 수감되었다.
선아: 사마천이 그와 무관한 이릉을 변호한 까닭이 무엇인가요?
채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태의 가벼움에 진저리를 느끼고 권력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는데 황제가 의견을 묻자 이릉을 변호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권력자는 사마천을 무고하고 비방했으며, 황제는 그의 권력을 위해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선아: 사마천은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나요?
채하: 당시 한나라 법에 의하면 사형수가 죽음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을 내야 했으며, 다른 하나는 궁형을 자청하는 방식이다. 그는 축적한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치욕을 감수하며 궁형을 선택했다.
선아: 그가 궁형을 선택한 까닭이 있나요?
채하: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집필 중이었던 사기를 완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 그 까닭을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한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더할 것이 없소이다.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선아: 사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조금 후에 말씀에 주시고요. 사마천의 사기와 관련된 그림이 있다면서요. 누구의 그림인가요?

세한도(추사 김정희, 1844)
세한도(추사 김정희, 1844)

 

채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도는 제주에 유배 중이던 김정희가 그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쓴 편지 옆에 그려 붙인 조그만 그림이다. 편지를 쓰고 남은 먹으로 찍어 그린 듯 간략한 그림이지만 세한도는 회화작품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 그림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보내야하는 개인의 슬픔과 분노와 권력의 비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특히 이 편지 모든 구절이 사마천의 사기에 근거하는 점은 특이하다.
선아: 그 편지의 전문을 말해주시겠어요?
채하: 「지난 해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책을 부쳐주었고 올해에는 또 <황조경세문편>을 부쳐주었소. (중략) 그런데 이 책들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주지 않고 외딴 섬에서 몰락한 사람에게 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권세가와 재력가를 추종하듯이 하는구려. 태사공 사마천이 말했다오. “권력이나 이익으로 만난 사람들은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교류도 소홀해진다”라고 그대 또한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이거늘, 어찌 이 세상의 권력과 이익의 도도한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권세나 재력의 잣대로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이오? 사마천의 말이 틀렸던가? 공자께서 가로되, 추운 시절이 된 뒤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하셨소.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 상관없이 시들지 않는 나무들이오. 추워지기 전에도 소나무 잣나무요. 추워진 뒤에서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이거늘, 성인께서는 유달리 추워진 뒤에 그들을 칭찬하였다오. 지금 그대가 나에게 대하는 방식이 이전에 더한 것도 없고, 이후에 덜한 것이 없소.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었으나 이후의 그대는 성인으로부터 칭찬받을만한 하오. 성인께서 특별히 칭찬하신 까닭은 늦도록 푸른 정조와 굳건함 때문만이 아니라 추워진 뒤에 느끼신 바가 있었기 때문이오. 오호라 전한의 순박한 시절 ‘금암’과 ‘정당시’처럼 훌륭한 사람들마저 그 빈객들과 잘 교류하다가 돌아서곤 하였으니 적공이 대문에 방을 써 붙여 풍자한 것 같은 박절의 지극함이라오. 슬프도다!」
선아: 권력과 이익으로 사람들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는 변덕스런 인심을 한탄하며 이상적의 한결같은 교분을 칭송하는 글이군요. 그런데 사마천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에요?
채하: 사마천이 사기의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인용한 공자의 말 “날이 추워진 뒤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를 재인용하고 있다. 공자의 이 말은 원래 사람들의 근본이 다른 점을 말하는데, 사마천이 천도를 논하며 이 구절을 적용함으로써 이 구절은 인간들의 배반을 경계하고 그 의미를 곱씹게 만들었다. 따라서 김정희의 세한도의 주제이며 편지의 핵심인 세한송백(歲寒松柏)의 구절이 공자의 논어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사마천의 비통한 역사인식을 거쳐 온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선아: 그 점이 그림에 나타나 있나요?
채하: 그림을 보면 바싹 마른 붓질이 성마르고, 앞뒤도 맞지 않게 기묘한 꼴로 웅크리고 있는 달창집은 외롭기 짝이 없다. 김정희의 슬픔이 드러나는 달창집과 마른 붓질은 푸른 송백을 세울 배경이다. 이 그림의 화제는 추운 날의 송백이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송백의 꿋꿋한 푸르름과 그들이 견디고 있는 추위와 외로움을 그려내고 싶었다. 이로써 송백에 빗댄 그의 칭송을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뒤편 잣나무들은 어딘가 성글지만 두 그루가 나란히 꼿꼿하고 오래 묵은 소나무는 온 몸이 거의 말라 묵직하게 내려앉았지만 뻗어난 한 가지에 난 솔잎이 튼실하다. 이 꼿꼿함과 튼실함은 칭송 받을만한 겨울날의 기상이고 고마움이다. 이 그림에서 가장 압도적인 이미지를 던지고 있는 이 소나무는 그 모습이 볼수록 처연하여 위태로움마저 느낀다. 추위 속에서도 푸름을 지키고 선 송백에게 고통이 없겠는가? 그 고통이 없다면 송백의 푸름에 무슨 감동이 있을까? 그것을 표현하려는 것이 김정희의 뜻이었을까 혹독한 시련과 외로움을 견디고 선 그림 속 송백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온다.
선아: 저도 샘이 편지를 들려주실 때에 자연스럽게 김정희의 슬픔에 공감했어요. 안타깝지만 세상인심이란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합니다. 송백 같지 않고, 그런 사람이라도 하늘의 보상을 기대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겠어요?
채하: 사기는 중국의 전설인 황제시대부터 그가 살았던 무제 때까지 2,000여년을 다루었다. 특히 주나라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제후국 50개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진을 비롯한 7개 국가의 흥망성쇠를 인물중심으로 다루었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인데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서술의 표준이 된 책이기도 하다. 인물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전체식의 역사서술방식은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사기나 고려사에도 쓰였다.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절망상태에서도 건재함을 보여주려는 행위였으며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에 언제라도 씻어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원래는 ‘태사공서(太史公書)’ 또는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불렸는데 그가 죽은 지 300년 정도 후에 사기라고 불렸다. 사기의 집필목적은 사마천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古今)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를 이루고자 한 의욕이었다. 즉 사마천은 역사집필에서 경지에 이르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또한 공자가 춘추를 서술한 방식에 바탕을 두고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그에 대해 역사가가 옭고 그름이나 선하거나 악함을 평가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사적이지만 그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사마천의 사기가 다른 역사서들과 확실하게 구별되는 지점은 그 안에 담긴 사마천의 현실적인 역사관이다. 특히 사기를 보면 사마천은 명분보다도 실질을 중시하는 관점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가령 항우는 유방에게 패배했음에도 항우를 유방보다 중시했다. 그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전한 혼란시기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갖고 있음을 사실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이다. 아무튼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개탄하고 부당한 억압을 딛고 통쾌하게 복수한 인물을 대거 편입시켰고,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대세를 바꾼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록하여 그 역할과 작용을 각인시켰다. 즉 시대와 국가를 가리지 않고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또한 사기는 보통사람을 중시하고 모두가 역사의 주체라는 역사인식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겼다.
선아: 선생님께서 사마천과 김정희를 故 노무현 대통령님의 유언에서 끌어내셨기에 글을 마무리하면서 사기(史記)의 한 구절로 부엉이 바위로 가셨던 노무현 대통령님의 슬픔과 분노를 담고 싶어요. 후대에 회자되는 유명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말했지 天道(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고. 그렇다면 백이와 숙제 같은 이들은 착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질고 고결한 덕행을 쌓기를 이같이 하였건만 그들은 굻어죽었지.... 나는 감히 이것을 의심하노라. 과연 천도라는 것이 있는가, 없는가? - 사마천 사기 백이열전” /박제원(전주완산고등학교 사회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