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위기철의 '아홉 살 인생'
[내가 읽은 책] 위기철의 '아홉 살 인생'
  • 새전북신문
  • 승인 2003.03.1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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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봄은 겨우내 쌓였던 먼지를 털어 내고 닫혔던 창문을 열게 하며, 햇살 부신 거리로 유혹한다. 파릇파릇한 싹이 돋고 연분홍, 샛노란 꽃이 피면 무작정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구쳐 오른다.하지만, 아른대는 아지랑이의 현기증처럼 어질어질 봄멀미를 하는 나로서 봄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게 못된다. 맥없이 속이 미싯거려 식사하기가 거북한가 하면, 상냥하고 투명한 햇빛에 놀라 음습한 곳으로 숨어들고 싶을 때도 있어서다. 그러나 올 봄만큼은 내게 뭔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서는 듯해 기쁘다. 그 중 하나가 ‘아홉 살 인생’에서의 주인공인 여민과의 만남이다. 우리의 인생역정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태어나서 청소년기까지를 봄이래도 좋을 것이다. 봄 빛은 맑고 투명해서 하얀 종이 같고, 흡인력 있는 스폰지 같다. 이렇듯 하얗고 여린 나이 아홉 살짜리의 눈에 비춰진 세상은 건강하고 행복하다기 보다 어둡고 칙칙한 세상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공장에 다니는 누이와 살고 있는 거짓말쟁이 신기종, 대학까지 마쳤지만 홀어머니의 치마폭에 묻혀서 골방에 틀어 박혀 사는, 그러면서도 천하를 꿈꾸는 골방 철학자. 얄미울 정도로 새침 떼며 허영쟁이인 장우림, 술만 마시면 동네가 시끄러울 정도로 집안을 박살내는 술주정뱅이인 아버지를 제 손으로 죽이고 싶어했던 검은 제비,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그림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덕에 노란 네모란 별명을 얻게된 백여민. 이들은 서울의 어느 한모퉁이 깔끄막진 산동네에 사는 우리의 다정한 이웃들이다. 이들을 통해 꿈과 현실이 공존하는 삶이 아홉 살 아이의 시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여민이와 나를 동일시하게 되었고 그래서 더 많이 공감하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나이 아홉 살 일 적에 나 역시 비탈진 산동네에서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어살았다. 엄마의 몫이긴 했지만 더러는 나도 양쪽에 양동이를 매단 물지게를 어깨에 걸고 고샅을 나섰다. 울퉁불퉁한 길을 내려가다가 삐끗 잘못해서 양동이가 구르는 날에는 동네가 시끄러웠다. 조금이라도 물의 손실을 막기 위해 닳고닳은 플리스틱 바가지를 둥둥 띄우곤 했었다. 간밤의 일들은 이튿날 신새벽부터 사립문 밖에서 춤을 추곤 했지만, 어려운 일에 내 일처럼 앞장서 도와 주었다. 가난하고 남루했지만 따뜻한 인정으로 서로를 감싸안고 살아가는 여민이네를 보면서 어린 날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작은 공동체이지만 그 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삶의 철학과 도덕성, 기쁨과 슬픔, 욕망과 좌절 그리고 사랑과 증오. 이런 것들이 어느 한 측면에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으면서 우리네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놓아 책 읽는 동안 내내 잔잔한 감동이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의 인생이 아홉 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흥미진진한 열 살, 열 한 살, 그 이상의 이야기로 그려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여분의 여백이 좋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나는 봄멀미 대신 봄아이가 되어 어린 시절의 달콤한 추억을 즐겼다. 어린 시절의 회상 한 자락이 봄 햇살처럼 다냥했다./이연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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