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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익산의 족보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10월 18일 13시13분
/문이화(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족보’하면 어떤 이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케케묵은 얘기를 하냐고 핀잔을 할 것이며, 어떤 이는 족보를 소중히 챙기시던 선친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한편 요즘 젊은이들은 수험기간에 선배들로부터 내려 받았던 보물같은 ‘모범답안지’라고 말할 것이다.

요새 세상에 족보를 보는 시각은 이렇게 제각각이지만, 족보라는 단어가 주는 공통의 의미는 중요한 뭔가가 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어떤 것이다.

한 집안 대대로의 역사 기록물이 문중의 족보라면, ‘읍지’와 같이 어느 한 지역의 지난 역사를 적어 놓은 기록물은 그 지역의 족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익산시와 원광대학교 한문번역연구소는 지난해부터 ‘익산문헌자료총서’라는 이름으로 `금마지'와 `여산 함열 용안 읍지' 번역서를 발간하였다. 물론 내년에는 금마일기, 유금마성기 등 금마의 모습을 전해주는 자료들을 묶어 문헌자료총서 세번째 권을 발간할 계획도 있다.

작년에 발간된 `금마지'는 익산군수 남태보가 재직시절에 보았던 익산 금마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지리지로 1756년에 저술되었다. 금마지를 통해서 우리는 18세기 후반의 미륵사지나 쌍릉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조선 성리학의 대부 우암 송시열이 어떤 인연으로 익산군 관아에 있던 정자의 기문을 짓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암의 형님 송시묵과 아우 송시도는 익산군수를 지냈다. 특히 1667년에 부임한 송시도는 형님이 군수 재직시 추진하였던 관아 건물 중수를 완성한 인물이다. 관아 경내에 있던 정자인 훈지당도 이때 지은 것이다. 그가 학문이 높은 우암형님에게 당기를 부탁했을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우암선생은 형제의 우애를 뜻하는 ‘훈지(壎篪)’를 넣어 정자의 이름을 짓고, `훈지당기'를 썼던 것이다. 기문의 내용 중에는 훈지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꽤 멋쩍어 했던 우암의 속마음도 살짝 읽히는데, 그러한 글을 금마지 번역서 발간으로 어려움없이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달에 발간된 `여산 함열 용안 읍지'는 1790년대 초반, 정조임금이 전국 단위의 지리지를 편찬하고자 추진했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지리지이다. 금마지 못지 않게 18세기 후반의 익산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익산의 족보이다. 여산읍지에는 우암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다는 팔괘정 정자의 기문이, 용안읍지에는 수 많은 명사들의 시문이, 함열 읍지에는 함열을 거쳐간 수령들의 명단이 실려 있어서 익산지역 역사 문화의 품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요즘은 전혀 상상불가지만, 예전에는 ‘족보있는 집안’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로 누구에겐가는 자부심을 주었던 것이 바로 ‘족보’였다. 이 고장에서 살다간 선조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익산문헌자료총서는 익산이라는 지역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공동의 자부심을 키워주는 또 다른 우리의 족보가 아닐까. /문이화(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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