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금요수필]쉰아홉 살의 에필로그

김영숙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1월 09일 13시34분

부산하게 달려온/ 갑진년(甲辰年) 섣달그믐 밤/숨 고르고 돌아보니/내 생은 어느새 반환점을 돌아/여름도 아닌 가을도 아닌/모호한 계절에 서 있다// 마음은 건조해 주름지고/ 수다처럼 나이만 늘어/길어진 한숨 뒤에/잃어가는 순수를 놓지 못하고/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이/팽팽하게 맞선 길을 앞에 두고/이제는 과감히 로그아웃//산을 넘으면 강이 거기 있고/강을 건너면 가시밭길 많았지만/다시 삼백육십 다섯 날의 씨앗/내 삶의 여백에 고이 심어서/날마다 해맑은 꽃길을 기대하며/첫사랑 만나듯 설렘 가득 안고/을사년(乙巳年)을 로그인.

이렇게 나의 50대 삶을 갈무리하며 새해를 맞았다. 의식을 치르듯 지인이 보내주신 다이어리를 펴놓고 비장함으로‘365일 늘 좋은 일만 계속되기를’, ‘작심삼일 되지 말자’라고 각오를 적었다. 늘 첫 마음은 거창하게 한해를 잘 살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맘때쯤 돌아보면 후회가 더 앞선다. 한 해 동안 나는 얼마나 따뜻한 말을 건네며 살았는가. 어떤 꽃을 보고 어떤 하늘을 보고 어떤 바람을 만났는가? 어느 날의 커피가 가장 향기로웠는가? 사소한 일상이 소소한 행복으로 스미기는 했는가? 1년의 삶의 궤적을 담은 다이어리를 펴니 여전히 아쉬움과 반성해야 할 일이 더 우세하다. 가시밭길을 더 많이 걸었다. 그중에 제일 힘든 일이 시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코로나19가 발생한 시기쯤에 우리 집에 오셨다. 올해로 벌써 6년째다. 작은아들네로 손주 볼보로 가신 지 20년 만의 일이다. 처음에는 2주 정도만 쉬었다가 가겠노라 하셨다. 그러나 그길로 어머니 짐이 옮겨졌고 “나는 이 방처럼 환한 데가 좋다. 저 작은방처럼 어두컴컴한 곳에서는 하루도 못 살겠다.” 하시며 안방에 짐을 풀었고 나는 삼십 년 넘게 쓰던 방을 내주고 하루아침에 방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하면서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야단치거나 온갖 욕을 하셨다. 그러다 보니 쌓이는 것은 스트레스요, 오는 건 우울증이었다. 물론 ‘치매 증상이니 그러겠지’ 하고 이해하다가도 어느 순간 가슴이 울컥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고민조차 사치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치매 증상이 심해져서 4개월 전 요양병원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갑진년(甲辰年)의 숙제’라는 수필에서는 어머니와 슬기롭게 잘 지내보겠다고 다짐을 썼었는데 숙제는 다 못 끝내고 아쉬움만 남았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그곳에서 잘 적응하고 치매 증상이 호전되어 다시 나의 고민 1순위가 되길 바랄 뿐이다.

어쨌거나 다시 새해가 준 소중한 365일 내 삶의 여백에 잘 채워 가리라. 감성은 늙고 싶지 않으니, 꽃도 좋고, 별도 좋고, 바람도 좋고, 커피도 좋고, 사람도 좋고, 사랑도 좋겠지. 나열하다 보니 좋은 일들이 더 많다. 꽃길을 걸을 날도 그만큼 많아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앞세우고 첫사랑 만나듯 을사년(乙巳年)에 로그인한다.

김영숙 수필가는

2006년 '月刊 시사문단' 등단

수필집: '사소한 아줌마의 소소한 행복', '섬진강 들꽃처럼', 시집 '꽃에 안부를 묻다'

제22회(2018년) 임실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전북시인협회 회원 현 임실문협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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