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온누리]가난한 노후, 부자의 죽음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1월 19일 14시25분

교장으로 퇴직한 어느 선배가 손주 양육을 위해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제법 넉넉하게 살았던 터라 걱정도 컸다. 막상 상경해서 보니 정신이 없었다. 손자, 손녀를 연이어 돌봐야 하니 외롭거나 허전할 틈도 없더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여유가 생겼다.

여유는 허전함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웠다. 어릴 적 상경한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했다. 그 친구의 조언에 따라 지하철을 타고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니며 서울을 샅샅이 훑었다. 지하철이 무료라서 자유로웠다. 친구가 말한 ‘서울은 노인 천국’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복지가 촘촘해 돈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무료급식소에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온양온천역까지도 전철이 무료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그곳에 무료급식소가 있다고도 했다. 온천 요금도 노인은 할인이 되니 하루 때우기 어렵지 않아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매월 400만 원이 넘는 연금 소득자의 자린고비 이야기이다.

돈이 돌아야 경제가 산다. 그런데 노인의 수중에 들어가면 그 돈은 정체된다. 돈을 쓰지 않으면서도 벌려고 한다. 가진 재산을 자식에게 주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다. 농촌 노인 중에 현금 부자가 많다는 어느 단위농협 지점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시는 더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일본이 먼저 겪었다. 일본 정부가 노인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여러 정책을 폈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노인 표를 노리는 정치권이 일자리까지 만들어주면서 소비가 감소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일본 노인들이 돈을 쌓아놓은 채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가난한 삶, 부자의 죽음이다.

우리나라 전체 순자산의 40% 넘는 돈을 만 60세 이상 노인이 갖고 있다. 그리고 계속 증가 추세이다. 2022년 3,658조에서 2023년엔 5.4% 늘어난 3,856조, 2024년엔 11.7% 늘어난 4,307조가 노인 자산이다. 연 2%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비하면 노인 자신의 성장세가 어마어마하다.

노인들은 왜 돈을 쓰지 않을까? 보편적인 답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에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75세까지 살 것으로 예상해 계획대로 썼는데 그 나이에 죽지 않으면 이후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불안감이다. 또 나이 들수록 돈 쓰기도 어렵다. 체력이 달려 어디 가기도 싫고, 산해진미도 소화가 안 되니 당기지 않는다.

중장년은 자녀 양육과 결혼, 애경사비 등 쓸 돈이 많아서 모이지 않는다. 노년은 그런 부담이 없다. 거기에 쓰지 않으니 부가 쌓인다. 주변에 가난한 노인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부자 노인들이 더 많다. 이들이 돈을 쓰지 않는 한 경제는 풀리지 않는다.

물론 부자가 많으면 좋다. 문제는 돈을 쓰는 부자가 아니라, 돈을 안 쓰는 부자들이 많다면 경제나 일자리는 위축된다. 그 선배처럼 젊은이들의 세금으로 복지는 누리고, 정작 자신의 돈은 안 쓰는 노인들이 늘어나는 한 사회가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판용(시인‧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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