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금요수필]내 인생은 지금 맛있게 발효 중

김영숙

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2월 06일 12시32분

내 나이 벌써 환갑이다. 언제부터인가 내 얼굴에 어울리는 머리형보다는 머리숱이 더 많아 보이는 머리 스타일을 고집하거나 흰머리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희끗희끗 흰머리가 정수리를 점령한 낯선 여인이 서 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삐걱거리는 곳이 많아진다. 한때는 퇴근하면 집안일이 첩첩이 쌓여있어도 식은 죽 먹기로 해치우곤 했는데, 이제는 눈에 보이는 일거리도 슬슬 미루고 드러눕기 일쑤다. 어쩌다 밀린 숙제하듯 일을 해치우면 끙끙거리며 잠을 설치는 날이 많다. 금방 해놓고 잊어버리는 건망증은 일상처럼 흔한 일이고 이유 없는 우울증이 몰려와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내가 왜 이럴까? 내가 나이 들긴 들었나 보다. 나도 한때는 펄펄 날았는데’ 하며 그냥 ‘인생이 한 단계 한 단계 발효되는 과정이겠거니’ 그리 나를 다독거린다. 스무 살쯤에는 바삐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서른 살쯤에는 사는 일에 허기져서 어릴 적 꿈같은 것은 가물가물 잊고 살았다. 그리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부록처럼 남은 세월을 덤으로 살아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왕 별책부록 같은 시간이라면 꽤 괜찮은 내용이 가득 찬 부록을 남기고 싶은데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은 우리의 그 어떤 소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흘러왔던 그만큼씩만 냉정하게 우리네 삶을 유유히 지나갈 뿐이다.‘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를 본 적 있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점점 젊어지는‘벤자민 버튼’, 그가 사랑하는 여자‘데이지’와 평생의 시간이 어긋나게 되는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판타지 영화다.

20대의 육체를 갖고 50대의‘데이지’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 속옷 사이로 늘어진 세월의 흔적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시선은 슬프기 그지없었다. 삶은 시간이 거꾸로 가든 똑바로 가든 사랑할 때 사랑하고, 절정을 맞을 때 절정을 맞으며 정상 궤도를 도는 게 무난한 삶이 아닐까 싶다. 삶이 누적되면 될수록 세월의 체감속도는 빨라지게 마련인데, 늘 젊음만 유지되길 바라는 욕심에 가속이 붙어 행여 제동장치라도 밟는다면 적응 못 한 우리의 몸은 세상 밖으로 튕겨 나갈지도 모른다. 혹여 방황하다가 잠시 감속이라도 할라치면 뒤에서 달려오는 자들에게 폐라도 끼칠까 염려되어 삶의 손잡이를 놓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요령 피우지 않고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자연히 그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고 백미러를 보는 요령도 터득하며 그 속에 비치는 내 모습도 보게 되는 것, 이것이 연륜이라고 짐작한다.천하일색 양귀비도 비켜 갈 수 없었던 게 세월이다. 제아무리 첨단의학의 힘을 빌려 회춘을 꿈꾸어본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인생이란 리필 받을 수 있는 커피 같은 것이 아닌 걸 어쩌랴. 내 머리카락에 은색이 점점 늘어간다고 해도‘지금은 인생이 맛있게 발효되는 중이구나!' 그리 여기며 마음을 다잡는다.

김영숙 수필가는

2006년 '月刊 시사문단' 등단

수필집: '사소한 아줌마의 소소한 행복', '섬진강 들꽃처럼', 시집 '꽃에 안부를 묻다'

제22회(2018년) 임실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전북시인협회 회원 현 임실문협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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