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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교수의 전북문화재이야기]호남최초의 여류서화가 설씨부인의 권선문

“설총의 후손이었던 설씨부인이 남편 신말주와 함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여 강천사 불사를 위해 쓴 권선문은 조선최초의 여류서화가 작품”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5월 26일 13시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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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서예가,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초빙교수)



국립전주박물관에는 보물 제728호인 (1482)이 소장되어 있다. 이 권선문을 짓고, 쓰고, 광덕산 주변을 산수화로 그린 사람은 바로 설총(薛聰, 655~?)의 후손인 설씨부인(薛氏夫人, 1429-1508)으로, 이를 작성한 곳이 바로 고향이였던 순창 남산마을이였기 때문에 설씨부인은 호남 최초의 여류문인이면서, 서화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 작품의 작성시기가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보다 70여년이나 앞서 있어서 조선최초의 여류서화가로 재조명 받고 있다.

설씨부인은 어린시절 순창에서 지내다가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에게 출가하였다. 신말주는 1454년(단종 2) 26살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단종의 폐위에 반대하여 처가인 순창으로 귀향하였다가 신숙주의 간곡한 청에 의해 1459년(세조 5)에 우헌납을 거쳐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전북에서는 1476년(성종 7)에 전주부윤에 부임한 후 전라도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바 있었고, 노후에도 정부인(貞夫人)과 함께 순창에서 보냈다.

이 권선문은 설씨부인 53세때 친정어머니 형씨부인이 선을 행하고 복을 짓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선몽하신 후에 광덕산 부도암 중수를 위한 시주를 얻고자 찾아온 약비(若非)의 내청(來請)을 받들고 대중들에게 사찰을 짓는 불사의 선업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을 지어서 행서로 쓰고, 광덕산 주변과 부도암 설계도를 산수화로 그려서 신도들에게 보이면서 권선하여 사찰조성금을 거두는 데 도움이 되게 한 것이다. 이렇게 538년전 사대부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에 관한 관심은 당시 남존여비사회에서는 아주 드물었던 수준 높은 여류문인의 문장과 여류서화의 탄생으로, 설씨부인의 학문과 예술관에 집중하고 있다.

첫째. 설씨부인에게는 사회 계도의식이 있었다. 권선문이란 사전적인 의미처럼 “불교에서 사찰을 세우거나 불사(佛事)를 베풀기 위하여 뜻있는 사람에게 보시(布施)할 것을 권하는 글”, 그리고 “신자들에게 절이나 부처를 위하여 재물을 바칠 것을 권하는 일 또는 그 취지를 쓴 글”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당시 광덕산 강천사의 중건을 위한 시주를 권선하는 문장이였다. 설씨부인은 숭유억불사회에서도 이러한 권선문을 작성하여 “보시를 하면 공덕을 쌀을 수 있고, 자신 뿐만아니라 임금과 어버이 그리고 천지만물을 이롭게 한다”며 신도들에게 선과 복을 짓도록 권선하면서 인과법을 강조하여 불사 뿐만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참여의식을 권장하였으니 당연히 선진적인 여성이라 할 수밖에 없다.

둘째, 설씨부인의 ‘여중군자(女中君子)’적인 학문적 수준이다. 권선문은 숭유억불사상 속에서도 인과응보설에 의한 문장으로 기승전결이 확실하다. 권문을 스스로 지어 대중을 설득하고 깨우치게 한 그의 포부는 당시 여성으로서 쉽게 이룰 수 없는 행보이기에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설씨부인의 학문적 재능에 대해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조선조의 뛰어난 여류로서 신사임당이 그림과 글씨의 미를 아울러 갖추어 있었으나 문장에 있어서 설씨 부인이 더 솟을 것 같고, 또 사임당에 비하면 선배여서 규방문학사에 특필할 만한 광채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셋째, 설씨부인은 조선최초의 여류서화가이다. 권선문은 전문이 1,103자인데 원래는 한 폭의 두루마리로 된 것을 후손이 훼손을 줄여 오래 보관하기 위해 한 폭에 네 줄 또는 다섯줄로 된 첩지를 16폭으로 분작하여 병풍과 같이 접어두는 절첩(折帖)으로 만들었다. 1-2폭의 그림은 별도로 라고 하는데, 이는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실경산수도로 산과 바위, 건물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고 조선초기의 산수화 경향을 잘 나타내고 있는 청록산수화이다. 나머지 3-16폭의 글씨는 행서로 쓰여 졌는데, 전체적으로는 당시 유행했던 송설체를 닮았으나 설씨부인만의 서풍이 활달하고 강건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이 설씨부인은 호남이 낳은 조선최초의 여중군자이며 여류서화가였고, 조선 최초의 여성 선각자였다. 더욱이 고향인 순창을 잊지 않고 남편과 귀향하여 인덕을 베풀고 보시를 하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았고, 남편인 신말주 또한 은퇴한 관료들과 더불어 ‘십로회(十老會)‘를 결성하여, 귀래정(歸來亭)에서 한운야학(閑雲野鶴)하며 시문을 읊는 가운데 높은 절개를 지키었으니 이 지역에 미친 영향 또한 매우 컸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전경은 신말주의 《십노계첩》《십로도상계축》에 남겨져 있어서 오늘날에도 그들의 멋진 삶과 예술, 그리고 풍류를 느껴볼 수 있으니 오늘은 설씨부인이 기거했던 ‘자혜당(慈惠堂)’과 ‘귀래정’을 거쳐 ‘순창여인들의 길’을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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