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월요아침]숙맥지란(菽麥之亂)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 물정이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5월 18일 14시54분

콩은 늦서리의 염려가 없는 6월 초․중순이 파종 적기다. 너무 이르면 저온에 의한 피해를 입거나 웃자라 쓰러진다. 보리도 파종 시기를 잘 맞춰야 겨울철에 잘 월동하고 튼튼하게 자랄 수 있다. 10월 중․하순이 파종 적기다. 이 두 곡물은 오곡에 속하며 사람에게 아주 이로운 단백질의 보고이자 쌀 다음가는 주식이다.

어릴 때 비교적 쉬운 일을 못하거나 간단한 것도 모르면 할머니는 “이런 쑥맥을 봤나” 하시면서 당신이 직접 해주시거나 가르쳐 주시곤 했다. 당시에는 ‘쑥맥’이란 말이 그저 ‘바보’란 말처럼 손주에 대한 애정어린 말씀 정도로 여겼다. 세월이 흘러 고등학교에 다닐 때 ‘쑥맥’이 숙맥의 된소리라는 것과 ‘숙맥불변(菽麥不辨)’이란 사자성어의 준말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할머니는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콩과 보리를 한자로 표기하면 콩 숙(菽), 보리 맥(麥) 곧 숙맥(菽麥)이다. 크기나 모양이 확연하게 다르다. 이처럼 콩과 보리는 생김새가 다른데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이라 칭한다. 또 사리 분별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에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근래에는 지나치게 순수하거나 숫기가 없는 순정, 금욕적인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

사람은 세상사 모든 일을 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배워 알려고 노력한다. 공자도 어렸을 때는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오곡인 벼․보리․콩․조․기장을 분별할 줄 모른다고 무시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논어 미자편).

따라서 숙맥이라고 말하면 글만 읽어 세상 물정에 어둡고, 살아가는데 실용 지식이 없는 선비들을 비꼬아서 하는 말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공자 자신은 의문이 들거나 배울 점이 있으면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묻고 배우려 노력한 사람이었다.

성현인 공자도 이런 태도로 배움에 힘썼는데, 하물며 범인들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 할까.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면 주위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책을 많이 읽으면 된다. 식견이 좁다면 넓히면 될 일이다.

그러나 개인의 무식이 죄가 되지는 않지만, 위정자라면 그 경우가 다르다. 우리 속담에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다. 속된 말로 하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뜻이다. 정치지도자가 무식해서 용감하면 나라가 혼란스럽고 국민만 피곤해진다. 지난 3년간 뼈저리게 느꼈다.

작년 12.3 불법 계엄에 따른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후 정치는 물론 경제도 백척간두에 서 있다. 아직도 내란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절반이 넘는다.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라는 사법부도 정치 한복판에 들어와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미국과의 관세정책 등 국내외적으로 불확실성이 커지는데, 여기에 교육개혁, 연금 개혁, 의료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 등 지난한 일이 산처럼 쌓여있다. 이런데도 탄핵 과정에서 일부 종교에서는 혹세무민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선량한 국민의 주머니를 털었다.

집안이 망하려면 식욕과 색욕에 홀린다는데, 숙맥 주체들이 혹세무민하고 있다. 정치권과 고위 관료, 검찰, 돈벌이 유투버, 일부 종교인이 숙맥지란의 주체다. 건전한 상식이 설 자리가 없으니 비상식, 몰상식이 상식인 양 행세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숙맥의 난’이 난무한 가운데, 기득권 권력은 그 위에서 마음껏 난세를 즐기고 있다.

정치가 혼란스럽고 경제가 어려울수록 위정자들은 국민이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식인과 언론 역시 사명감으로 바른말과 정론으로 감시해야 하는데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숙맥의 세상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 살아남는다.

/이태현 고원공간정보 부회장 · 전 무주부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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