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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발로 쓴다. ‘발로 쓰는 동학과 동학혁명의 역사’라야 감동을 줄 수 있다.

다시쓰는 동학·동학농민혁명사 /박맹수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5월 29일 17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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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현장(現場)을 직접 답사하여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그 확인된 내용을 연구에 반영한다. 이것이 필자의 세 번째 좌우명이다.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일은 원(原)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 사료 중에서도 동학 도인(道人)들과 동학농민군 자신이 남긴 사료를 중시해야 한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다음, 사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현장에 직접 서 보는 일이다. 역사적 현장 답사를 중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동학 교단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그 사건이 일어난 무대는 고유한 특징을 지니게 마련인바, 그 특징 역시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개성적(個性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학 교단 및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건 및 인물 연구를 위해서는 관련이 깊은 고을이나 장소의 모습을 각각의 장소를 둘러싼 자연조건이나 지리적 조건과 관련지어 고찰하는 것이 요청된다. 동학과 관련이 있는 어떤 사건 현장을 직접 가서 보게 되면 사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던 내용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의문을 가졌던 내용이 한순간에 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발로 쓰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현장 답사를 중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왕조 지배층과 보수 유생 측으로부터 오랜 기간 탄압을 받으며 지하포교(地下布敎) 활동을 통해 교세를 확대해 왔던 동학 교단의 주요 활동 무대 및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된 핵심 지역은 체계적인 학술조사를 통해 정확하게 그 전체 모습이 확인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현장 답사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할 필요가 절실하다.

예를 들면,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1861년 6월경 동학에 입도하여 1898년 4월에 체포되기까지 38년 동안 경상도⸱강원도⸱충청도⸱전라도⸱경기도 등 약 250여 군데를 떠돌며 비밀포교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박래원,「춘암상사의 행적」상,『신인간』293, 1972년 1⸱2월호, 28쪽) 해월 선생이 은거하며 비밀포교 활동을 벌였던 장소는 천도교 교단의 고(故) 표영삼(表暎三, 1926-2008) 선생의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덕분에 그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표 선생은 1977년부터 2008년 작고하기 직전까지 동학 교단의 성지(聖地)를 비롯하여 비밀포교지를 일일이 답사하였고, 답사를 통해 확인한 내용을 천도교 기관지『신인간』(新人間)에 연재하였으며, 그것은 후일『동학』1,2(통나무, 2005)로 집성되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위 사진 참조)

표영삼 선생 외에 일찍이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기록으로 남긴 이들이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일 때 혁명의 현장을 직접 찾아 기록을 남겼거나, 혁명의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일본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 글에서는 전봉준을 만난 일본인들과 그들이 남긴 기록에 대해 소개한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전봉준 장군이 처음으로 일본인을 만난 날짜는 1894년 7월 8일(음력 6월 6일)로 확인된다. 이날, 전봉준은 전주화약(全州和約) 직후에 전라도 53개 군현에 설치된 도소(都所; 지금까지는 집강소라 불렀다)를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이 전개하고 있는 폐정개혁(弊政改革) 활동을 독려하는 지방 순회 도중에 순창(淳昌)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에서 전봉준은 일본인 낭인(浪人)집단 천우협(天佑俠) 회원 14명과 만났다. 전봉준이 천우협 일행을 만난 사실은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이육신보』(二六新報)에「마사검명록」(馬사劍鳴錄)(1894년 8월 11일, 12일, 15일자 참조)이란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이때 전봉준은 가명 김봉균(金奉均)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만났다고 한다.「마사검명록」은 강창일(姜昌一) 전(前) 국회의원이 도쿄대(東京大) 대학원 재학 시절에 발굴하여『사회와 사상』창간호(1988년 9월)에 소개함으로써 국내에 널리 알려졌다.

다음으로, 전봉준 장군은 1894년 7월 20일(음력 6월 18일) 전라도 능주(綾州)에서 일본 낭인 출신인 우미우라 아츠야(海浦篤彌, 1869-1924)를 만났다. 우미우라는 7월 5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충청도를 경유하여 7월 14일 전라도 고산현(高山縣)에 도착한 지 6일 만인 7월 20일 능주에 도착하여 전봉준 장군을 만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만남 역시「동학당시찰일기」(東學黨視察日記)란 제목으로 일본에 소개되었는데, 우미우라와 만날 때도 전봉준 장군은 가명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우미우라 아츠야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우미우라는 1869년 일본 아오모리현(靑林縣) 니시츠가루군(西陸奧郡) 후카우라(深浦; 현재의 深浦町)에 있는 사찰 엔카쿠지(圓覺寺)의 25세 우미우라 손카이(海浦尊海)의 4남으로 태어났다. 후카우라소학교(深浦小學校)를 나온 뒤, 히로사키(弘前)에 있는 도오의숙(東奧義塾)을 거쳐 1887년 9월에 이기리스법률학교(英吉利法律學校; 현재의 주오대학=中央大學)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언인(代言人; 변호사) 시험 합격에 실패한 뒤 진로를 변경하여 1890년 12월 말 그의 정치 입문을 위한 자문역이었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1858-1954)의 권고에 따라『초야신문』(朝野新聞) 및『유빈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 통신원 자격으로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으로 건너온 뒤에 형 우미우라 요시미(海浦義觀)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우미우라는 조선을 ‘예상외의 야만국’이라고 표현하는 등 조선 멸시관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일면식도 없는 청국 공사 위안 스카이(袁世凱, 1859-1916)에 대한 면담을 신청하는 등 돌출 행동으로 인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퇴거 권고를 당하는 등 요주의(要注意) 인물이었다.(河西英通,「民權後靑年のナショナリズム-海浦篤弥⸱朝鮮だより」,『自由民權』4호, 1990년 3월, 5쪽) 또한, 그는 서울에 체재하면서 화가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과도 교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용준,『근원수필』, 청색종이, 2022 참조) 1893년 1월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그해 11월에 부인(우미우라 요시)를 대동하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왔다. 1894년 4월(음력 3월)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입헌개진당의 의뢰를 받아 전라도로 남행(南行)하여 동년 7월 20일 오후 1시에 능주(綾州)에 도착하여 때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전봉준과 면담하였다. 일기에 따르면, 면담 요청에 응한 전봉준은 김봉균(金奉均)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 우미우라는 전봉준 장군과의 면담이 성사되기까지의 남행 일정 및 2일간에 걸친 면담 내용, 면담 이후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하여「동학당시찰일기」라는 제목으로『일본인』(日本人) 18호(1895년 2월)에 기고하였으며, 이 일기는 그의 사후에 간행된 문집『초재유고』(初齋遺稿, 1925년 8월)에 다시 수록되었다.(아래 자료사진 참조)





『일본인』제18호(1895년 2월)에 실린「동학당시찰일기」









『초재유고』(1925년 8월)에 실린「동학당시찰일기」





세 번째로 전봉준 장군이 일본인을 만난 날짜는 1894년 9월 10일(음력 8월 11일), 장소는 전주(全州)의 동학농민군 대도소(大都所)였다. 여기서 전봉준은 일본인 히로시마 모씨(廣島 某氏)와 만났다. 이 히로시마 모씨는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설치된 일본군 대본영(大本營)에서 파견한 스파이로 추정되는바, 그 역시 전봉준과의 만남을「동학당여문」(東學黨餘聞)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대본영에 보고하였고, 대본영에 보고된「동학당여문」은 1895년 10월 5일자 일본의 각 일간지에 그 내용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때도 전봉준은 역시 가명 김봉균(金鳳均)을 사용했다.

끝으로, 필자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현장 답사의 교과서로 삼았던 답사 여행기 두 권을 소개한다.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길잡이가 된 두 권의 책

왼쪽: 문순태의『동학기행』(1986), 오른쪽: 김지하의『사상기행』(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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